**至心歸命禮 **

천수경 해설(천성스님)

雪松 2011. 8. 26. 18:07

천 수 경 해 설

千 手 經 解 說

 

 

 

 

 

강사: 현성(玄性) 스님

2549년 12월 1일

 

 

   

시카코 불교대학

대한불교조계종 미국시카코 불타사

 

 

 

< 목 차 >

 

 

제1장 진언(眞言)

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나.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라.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제2장 천수대다라니계청(千手大陀羅尼啓請)

가. 관세음보살 찬탄

나.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다. 육향육서(六向六誓)

라. 관세음보살 12가지 명호와 화신

 

제3장 신묘장구대다라니

 

제4장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소덕

가. 사방찬(四方讚)

나. 도량찬(道場讚)

다. 참회게(懺悔偈)

라. 참제업장(讖除業障) 십이존불(十二尊佛)

마. 십악참회(十惡懺悔)

바. 참회진언

 

제5장 준제진언

가. 준제진언의 공덕

나. 준제보살

다. 네 가지 진언

 

제6장 여래십대발원문

 

제7장 사홍서원과 삼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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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진언(眞言)

 

우리나라 불교의 모든 의식에는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반드시 독경하는데 『천수경』과 『반야심경』은 관세음보살님이 주인공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불교는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을 찬탄하는 관음신앙을 위주로 그 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 제4권 자장율사조에 보면 자장율사의 아버지가 후사(後嗣)가 없어서 지극한 기도를 했다. 기도 중에 천분의 관음상(觀音像)이 필요하다는 계시를 받고 천분의 관음상을 조성한 뒤 자장율사를 잉태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장율사는 불연(佛緣)이 깊어 초기 신라불교의 초석을 세우신 명승이다. 신라 의상대사는 낙산사 홍련암에서 목숨을 내건 기도를 한 끝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백화도량발원문(百花道場發願文)에는 「나는 몸과 마음을 다해서 관음대성을 지극히 받들어 섬깁니다. 이 세상 모든 중생들이 관세음보살 대비신주를 외우고 천수천안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생각하며 다 함께 관세음보살님의 원통삼매에 들게 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한 것으로도 그의 지극한 관음신앙심을 알 수 있다.

 

원통(圓通)이란 말은 관세음보살님께서 모든 중생들의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하여 주신다는 뜻으로 ‘두루 통한다’는 뜻이다. 관음기도를 올릴 때에 ‘나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이라 하고 정근을 시작한다. 보문시현(普門示現)의 뜻은 언제 어느 곳에나 나투시지 아니하는 곳이 없다는 말씀이고, 원력홍심(願力弘深)은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원력이 대단히 넓고 깊다는 뜻이며, 대자대비(大慈大悲) 구고구난(救苦救難)은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서 중생을 모든 고통에서 구제하시고 모든 액난에서 구원하신다는 뜻이다.

 

최근세사에 와서 수월(水月)스님과 용성(龍城)스님 같은 대선사께서도 천수다라니 염불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스스로 말씀하시고 후학들에게 천수다라니 염불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 참선수행을 하면 순조롭게 정진할 수 있다고 이를 권장하셨다. 숭산(崇山)스님도 출가 후 젊은 나이에 천수다라니 37기도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계종 산하 사찰에서는 동안거 입재 시에 100일 관음기도 입재하여 해제 시에 회향하는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발원을 관세음보살님 전에 지성으로 끊임없이 기도 올리면 두루 성취되지 아니함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 『천수경』이다.

 

재가 신도님들이 무엇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가족이 건강하고 정신과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즐기며 자녀들을 훌륭하게 기르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소원이 원만히 성취되게 하고자 불교를 신앙하고 경율론 삼장을 공부하고 독경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불교를 신앙하여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바램의 원동력은 부부의 애정과 사랑 화목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부부의 화목은 보람 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생명력을 소생하게 하고 유지 발전시키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가정은 우주의 축소판이요, 국가의 최소 단위체요, 사회생활의 첫 관문이며, 사회와 국가 및 세계 평화의 일익을 담당하는 저력(底力)의 소생 처이기 때문에 가정이 안정되고 행복해야 그 사회와 국가와 세계도 안정되고 행복하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 풍조는 부부의 애정(愛情) 사랑 화목을 심각하게 저해(沮害)하고 자녀들의 윤리 도덕관을 혼탁하게 하여 많은 가정의 식구들이 도산(逃散)하는 경향이 증가함에 따라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인가 하는 혼란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에, 청소년 문제 사회 국가 인류 평화의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게 귀착한다. 그러나 나 자신의 생명의 활력은 가정에서 일어나므로 모든 문제는 부부 사이의 애정 사랑 화목의 문제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천수경』이 자신은 물론 부부의 애정 사랑 화목, 그리고 사회를 위하여 어떻게 해독되어야 할 것인가의 관점에서 해설하고자 한다.

 

 

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천수경』은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에서 시작한다.

 

이는 우리 인간생활에서 깨끗한 말을 하는 업(業)이 가정의 화목을 이루고 사회와 국가 및 세계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지켜야할 계(戒) 중에 가장 우선(優先)하는 업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우선하는 업이라고 볼 수 있음으로 항상 깨끗한 말을 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깨끗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내 자신이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함은 물론, 말의 상대되는 사람을 한 단계 높이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말의 상대가 한 단계 높이 보여 질 때, 보다 깨끗한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부부사이에 배우자를 한 단계 한 단계 높여 관세음보살을 대하듯 하라는 것이 『천수경』의 뜻이라고 해석된다. 자신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화합하고 보다 생산적인 연을 맺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추고 이들을 모두 한 단계 한 단계 높여 관세음보살님을 대하듯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입은 재앙의 문인 동시에 진실과 광명의 문이기도 하다. 마치 칼날에 양면성이 있는 것과 같다. 배우자에게 관세음보살님을 대하듯이 깨끗한 말을 하는 것은 애정을 나누고 화합을 도모하게 되어 필경 너와 내가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이 소생하게 한다. 그러나 거친 말은 애정(愛情)보다 증오(憎惡)를 키우고 화목(和睦)보다 불화(不和)를 도모하게 하여 너와 나를 상반(相反)되고 대립(對立)하게 하는 작용을 한다. 대립은 경쟁과 투쟁을 불어오고 어느 한쪽의 몰락을 가져오기 때문에 필사적인 분쟁(分爭)의 비극을 초래하게 되어 있다. 말은 듣는 사람의 생각을 혼란하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고, 환장(換腸)하게 하고, 억울하게 하며, 오열(嗚咽)을 일으키게 하고, 불치병을 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말은 듣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모욕(侮辱)을 당하였다, 멸시 당하였다, 심지어는 인격을 살해(殺害) 당하였다는 원한을 사게 하는 악독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말은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하고, 살기 편안하고, 안온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주고, 하는 일들을 원만히 성취시켜주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나쁜 말이든 좋은 말이든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고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말을 통하여 알 수 있음으로 마음은 말과 행동을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마음에서 흘러나온 말과 행동은 다시 그 마음으로 돌아가 다음 말과 행동의 마음이 된다. 이와 같이 말과 행동에서 알게 된 자기 마음을 가지고, 나쁜 말에 대하여 참회하여 마음을 정화하고 좋은 말에 대하여도 더욱 마음을 정화하여 더욱 좋은 말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말이란 묘하여 말하는 사람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마음 상하여 화를 낼 수도 있고, 의도는 상대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한다는 것이었으나 오히려 해가 되어 관계가 험악하여 지는 경우도 흔히 있기 때문이다. 발심하여 마음을 항상 청정히 하려고 노력하여 자신과 가정 사회에 좋은 기운의 향기를 퍼지게 함으로서 사회정화에 기여하자.

 

어떻게 우리들의 말을 정화할 것인가?

그 방법을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가 설하고 있다. 이 뜻을 풀이하면, 「길상존(吉祥尊)이시여, 길상존이시여, 대길상존(大吉祥尊)이시여, 극길상존(極吉祥尊)이시여, 그 길상이 원만히 성취되게 하소서」이다. 축원과 찬탄하는 존자이시다. 예를 들면, ‘행복을 저에게 주시는 존자시여, 행복을 저에게 주시는 존자시여, 저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하시는 존자시여, 저에게 성공을 가져다 수시는 존자시여, 모든 길상(吉祥)이 원만히 성취되게 하소서’ 등의 칭찬과 찬탄과 상대방을 향한 차원 높은 긍정적인 표현이다.

이와 같은 차원 높은 긍정적인 주문은 우리 인간이 살아오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엄청난 구업을 지어가며 살아 왔는데 그 구업을 참회하고 깨끗이 하려면 남을 한층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칭찬하고, 찬탄하고, 축복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찬탄과 축복은 업장을 소멸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선덕(善德)을 쌓는 업이라는 점에 중요성이 있다.

 

그리고 이 주문은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이유를 막론하고 찬탄과 축복을 아낌없이 하라는 뜻인데, 우리들의 배우자에게 만이라도 그렇게 하지 못하여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덕의 베풀음은 남편이 먼저 부인에게 항상 행함으로서 남편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부인의 애정과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애정과 사랑과 존경은 가정의 화목을 이루게 할 뿐만 아니라 부부가 하나 되어 좀 더 잘 살고자하는 의욕과 희망을 불어 주는 가정의 생명력이 생동하고 증장되어 반야지혜의 감응으로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소원 성취를 원만히 이루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회향하게 된다.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서 염불을 하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이 관세음보살로 변해 관음의 화신이 된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내가 관음의 화현이 되어서 모든 액난과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이 양성되고 용솟음치는 활력을 얻어 모든 병고 액난을 멀리하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해탈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나.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安慰諸神眞言)

 

오방내외(五方內外)에 계시는 모든 신장(神將)님들을 안위(安慰)하게 하여 드리는 진언(眞言)이다. 모든 구업(口業)을 정화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이 우주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 관세음보살, 화엄성중님들을 편안하게 하여드리는 진언이란 우리들의 생활환경에서 느끼는 모든 물질적, 애정적 한계에서 초월하여 무한한 우주를 상대로 하는 자신으로 승화하게 인도 하는 진언이다. 이 진언을 지극 정성으로 외움으로서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모든 구속에서 해탈하여 가없는 마음이 우주와 일치하고 그 마음속의 우주에 모든 부처님 보살님 그리고 모든 신장님들이 편안히 계신다는 진언이다.

 

마음의 구속에서 해탈하지 못한 우리 인간이 걷는 길엔 어둠보다 더 무서운 불우한 암흑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 특히 자기 인생에 가장 귀중하고 소중한 것을 가졌을 때 그것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마음은 그것을 놓치거나 잃거나 상처를 입게 될까 봐 가슴 조이는 공포감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부인,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딸 등이 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무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이 언제 어디에서나 편안하고 남의 침해로부터 보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을 독송한다.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나무: 몸과 마음 다 바쳐 의지합니다. 귀의합니다.

사만다: 두루, 보편(普遍). 모든 중생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상의성(相依性)이 보편성(普遍性)이다.

못다남: 못다는 붓다와 같은 말로 아주 완전함을 이룬 이, 가장 거룩한 이. 은 그러한 분들, 따라서 ‘못다남’은 많은 부처님들이라는 뜻이 된다.

옴: 우주에 충만한 근본 힘이여.

도로도로: 아주 성스럽고 신성하며, 연기법을 잘 지키는 것을 뜻한다.

지미: 밝고 아주 밝은 씨앗이여.

사바하: 그렇게 되어 지이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전체를 다시 정리하면, ‘모든 부처님들께 귀의하고 의지하고 삽시다. 우주에 충만한 근본 힘이여! 아주 성스럽고 신성한 그 밝은 마음자리를 의지하여 함께 도와주고 북돋아 주면서 서로 서로 살려가면서 삽시다. 그렇게 되어 지이다.’

 

지금 시방에 아니 계신 곳이 없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緣起)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모심으로써 오방내외에 계시는 팔부신장님들과 모든 신들을 편안히 위로하는 씨앗이 되고, 또 그런 상태가 성취되도록 한다는 뜻이다.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그대로 행하겠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따르면 오방내외 모든 신(神)이 편안하고 위안을 받지만, 연기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모든 신(神)이 노하여 오방내외가 불안하여지고 공포에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자비와 지혜로써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들의 삶에서는 자비와 지혜로써 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첫째, 친척간의 문제이다. 혈육을 같이하는 일가와 외가와 처가와의 인간관계를 말한다. 인간관계에 있어 연기법을 이해하고 이익을 생각지 않으며 내 몸 생각하듯 자비심으로 서로를 돕고 이해하는 진실한 친척관계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랄 수 있지만 간혹 서로 잊고 살거나 멀어져서 친구나 이웃보다도 못한 때도 더러는 있다. 그래서 친척으로부터 원성을 사고 거리가 생기면 생활이 늘 불안하고 고독해지기 쉽다.

 

친척들이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여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삶은 진실한 삶이 아님을 깨닫게 하고, 재물보다는 자연스러운 사랑과 인간성을 소유했을 때 친척간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따뜻한 정과 지혜가 우러나게 되고 가정을 행복과 발전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 때 연기법을 바로 이해하고 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를 보는 오방내외 모든 신들이 위안을 받고 그들에게 더 없는 행복이 깃들게 할 것이다.

 

둘째, 이웃과의 문제이다. 한 세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웃이다. 이웃은 나를 그리고 나의 가족을 해칠 수도 있고 도울 수도 있다. 내 집의 주변 내 생활의 연관자만이 아니라 한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과 중생 자연은 다 이웃이다. 이런 생각으로 사람과 중생 자연을 대하는 사람이라야 이웃의 고마움을 알고 그 이웃과의 원활과 화평을 위해 계율과 도덕과 사회규범을 지키게 된다. 계율과 사회적 도덕과 규범을 잘 지키려고 노력할 때, 내가 이웃에게 좋은 이웃이 된다. 내가 스스로 이웃에게 좋은 이웃이 될 때, 좋은 이웃을 얻을 수 있다. 좋은 이웃을 가진 사람이라야 이웃끼리의 관계를 원만히 할 수 있고, 이러한 이웃이 사는 사회와 자연은 믿고 살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믿을 수 있는 풍조라야 평화가 깃들인다. 평화로운 이웃을 가진 사람은 가정에서도 남편으로서의 도리와 부인으로서의 도리도 다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연기법을 바로 이해하고 행하는 도리이고 오방내외의 제신이 평안(平安)하고 위안을 받게 되어 이들의 가피를 받게 될 것이다.

 

셋째, 자신과의 문제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의 무지(無智)이다. 생각이 지혜롭지 못하여 앞뒤를 생각지 않고 체면이나 수치감을 생각지 않으며 막되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덤벼들었을 때 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는 없다. 이것은 사회의 적이요 만인이 싫어하는 하등 인간의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오방내외제신을 불안하게 하여 자신의 처지를 가장 불행하게 몰아간다.

 

오방내외제신을 평안하게 모시기 위해서는 연기법을 바로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혜로운 행위이다. 자기의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항상 선을 익히고 악을 멀리하며 어질고 고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되 적을 만들지 않고, 세상의 무상한 변모에 현혹되지 않고 조용히 관조해 가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을 도모하고, 또 그가 세운 대서원(大誓願)을 위하여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아내를 사랑할 줄 알고 가족을 위하고 사회를 염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지혜는 방심하지 않고 항상 현재의 자기보다 높은 자기를 바라보며 스스로 세운 서원을 믿고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현재의 자기보다 높은 자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오늘보다는 내일에 있을 보다 나은 방법을 생각해 냄이 옳을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가 위치한 현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내일을 위한 희망과 그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반성하는 태도라고 하겠다. 반성이란 하나의 행위에 대해서 냉정히 비판해보고 부끄러움이 있는가를 알아서 부끄럽지 않도록 고쳐 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가 부끄럼 없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더 높은 인격자로서의 방법을 생각해 내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데 있다. 이것이 부단한 발전을 가져오는 동기와 방법이 되는 것이요 인격도야의 방법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사회인의 자세이며 인류를 복되게 하는 지름길이며 오방내외안위제신하는 법이고 날로 자기를 향상해 가는 구도(求道)를 중시하는 마음가짐이고 자세이다.

 

넷째, 직접적인 이유도 없는 사람이 자기를 시기하고 질투하고 방해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문제이다. 현세에 직접적인 이유 없이도 우리가 잘하는 것, 잘 되는 것을 보고 배 아파 하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주위에는 많이 있다. 생각해 보면 한심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에 있는 경우라면, 지혜와 자비심으로 오방내외안위제신를 하도록 최선을 다하여야하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 같이 험담 하지 않고 그들의 시비를 들어주는 아량과 지혜를 길러야만 오방내외안위제신이 된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다. 개경게(開經偈)

 

개경게 (開經偈)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개경게(開經偈)란 경을 여는 게송으로 경을 찬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중 무상(無上)이란 심심미묘한 법이 위없이 가장 높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 법을 깨달은 사람은 삼계(三界)에서 위없이 가장 높은 법을 깨달은 성자(聖者)가 되기 때문이다. 심심(甚深)하다는 것은 우주의 생성원리는 연기하는 법인데 나 자신을 포함해서 우주의 모든 생명과 생명들이 연기하며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원리가 깊고 깊다는 뜻이며, 미묘한 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 안에 우주가 포섭됨으로 우주에 있는 모든 하느님들,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신장님, 축생, 지옥 중생 등이 모두 내 마음 안에서 작용하기에 이들과 나와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너무나 미묘한 법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심하고 미묘한 법이기 때문에 무상(無上)한 법이고 이 법을 깨달은 자는 삼계에서 위없이 높은 성자가 된다는 것이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란 백천만겁 동안에도 만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왜 그러하냐하면 첫째는 인신난득(人身難得)이다.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과정에서 금생에 사람 짓을 하지 못한 일이 너무나 많아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다는 말씀이다. 둘째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다. 불법을 만나기란 바다 밑에 사는 거북이 천년 만에 수면 위로 올라와 구멍 난 목판을 만나 그 목판 가운데 있는 구멍을 찾아 그 구멍에 머리를 내 밀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것이 어려운 만큼 기나긴 세월이 흘러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하면

첫째 성불하신 부처님과 같은 때에 이 세상에 태어나 부처님의 지도를 직접 받기란 너무나 어려운 확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훌륭하신 선지식을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만났다고 하더라도 선지식을 알아보지 못하여 바른 법을 듣고 바른 법이라고 이해하고 따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 법을 서로 설하고 듣고 나누며 갈고 닦는 훌륭한 도반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넷째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심과 게으름 때문에 신심이 생기지 않아 믿고 부지런히 따르기 어렵기 때문에 불법을 만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셋째는 위승난행(爲僧難行)이다. 스님이 되어 스님다운 행을 하기 어렵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불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스님이 되고자 하는 발심을 하기 어렵고 불도(佛道)를 닦기 어려우며 성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란 제가 이제 그 법문을 듣고 보고 얻어 받아 행(行)한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세 가지 지혜를 말씀하셨다. 세 가지 지혜란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라고 알려져 왔다. 듣는 지혜, 생각하는 지혜, 실행하는 지혜가 있어야 함을 말한다. 듣는 지혜가 이루어지기까지 수 없이 많이 들어야 한다. 수 없이 많이 들어야 들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들은 것을 이해해야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생긴다. 생각할 줄 아는 지혜가 생겨야 여러 가지 새로운 창의력이 생기고, 바른 창의력이 있어야 바르게 행할 수 있는 지혜가 열린다.

 

천수경을 강의한다고 TV 라디오 신문 등에 광고하여도 들을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극히 드물다.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법을 설하는 무한한 공덕을 지어야 한다. 설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듣는 사람도 자연히 많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야 이해하고, 만져보고,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얻어 받아서 자신이 직접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란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게 되기 원합니다이다. ‘원하옵건데 여래의 진실한 뜻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보고 얻어 받아 행하여 부처님의 참 뜻을 깨닫기 위해 발심하여 정진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라.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옴 아라남 아라다

옴 아라남 아라다

옴 아라남 아라다

 

법장(法藏)이란 법을 갈무리하고 있는 창고이니 결국 경전(經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경전이란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한 차원을 높이면 법장이란 우리들의 마음이 된다. 따라서,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은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진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의 성격에 어긋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마음의 문이 열려 있다고 하더라도 선별(選別)적이고 의심이 많아 부처님의 법을 진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옴 아라남 아라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옴 아라남 아라다」가 되기 위해서는 ‘무쟁삼매(無諍三昧)가 되어야 한다. 무쟁(無諍)이란 다툼이 없다는 뜻이니, 오방내외가 안위하여 마음에 번뇌와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번뇌와 갈등이 없다는 것은 나와 내 것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났다는 의미가 된다. 나와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음으로써 자기의 고정된 성격이 무너지고 무아(無我)를 이루어 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천수경을 접할 마음의 준비가 된 것이다. 이 무쟁삼매는 화목한 가운데 번영하는 가정과 직장생활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개법장진언이다.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옴 아라남 아라다의

옴: ‘아우음aum’을 빠르게 발음하는 기분으로 ‘오움’ ‘옴’을 발성할 때 입에서 나오는 ‘옴’의 진동하는 파장이 우주에 충만한 근본 힘과 같은 파장이라 이와 저절로 연결되어 일치하여 진다. 내 입에서 나오는 파장과 우주의 근본 힘의 파장이 일치되었을 때 우주의 힘이 내 것보다 훨씬 큼으로 우주의 힘이 소리의 파장을 타고 강한 곳에서 약한 나에게 충전되어 나의 몸 전체 세포에 우주의 근본 힘이 충만 되게 하여 옴 삼매에 들게 하는 주문이라 한다.

 

아라남: 마음의 크기를 나타내는 말로 어떠한 액난이나 고난이 와도 충분히 받아들일 만큼 넓고 무한한 마음을 말한다.

아라다: 마음의 능력을 나타낸 말로 깊고 넓고 무한한 내 마음이 바로 원하는 바를 다 이루는 무한 능력자이다.

「옴 아라남 아라다」는 내 마음자리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불가능과 굴할 줄 모르는 무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진언이다. 경전을 열어서 어떤 난해한 말씀이 있고 주변 환경이 아무리 공부하기 어렵게 된다 해도 우주의 근본 힘으로 이를 포섭하고 극복해 나가겠다는 서원이다.

그러므로 경전 자체에서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기필코 이겨내겠다는 넓고 능력 있는 마음을 열기 위하여 법장(法藏)의 문을 연다는 엄숙하고 공손한 발원이다.

 

 

 

 

제2장 천수다라니계청(千手陀羅尼啓請)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

(千手千眼 觀自在菩薩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 啓請)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지신 관자재보살님이 끝이 없는 하늘같이 광대(廣大)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모양과 색이 다른 일체 중생에게 조금도 차별 없이 원만하게 대하여 주시고 그 능력이 무량무변하여 일체 중생을 걸림 없이 구제하시는 그의 대비심을 깃든 이 대경(大經)을 스스로 깨치기(계몽하기) 위해 청하옵니다.

 

부처님은 한없는 하늘같이 넓으시고 밑이 없는 바다처럼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지신 불가사의한 존재이시다. 불가사의한 청정한 공덕을 햇님이 햇빛을 비추듯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나의 마음, 나의 집안,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또한 모든 중생의 가슴 속에 한 없이 골고루 나누어 주신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위신력은 누구에게나 미치지 아니하시는 곳이 없다. 온 중생, 온 세계, 온 우주는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걸림이 없음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편견이 있거나 아집이 있거나 집착이 있으면 걸림이 있는 것이요, 걸림이 장애되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지만 부처님은 걸림 없는 위신력과 대비심으로 탄탄대로를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신다.

 

이와 같이 우리도 스스로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이 되어 천 개의 눈으로 배우자에게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할 일을 빠짐없이 찾아 살피고 천 개의 손으로 할 일은 남김없이 처리함이 넓고 크고 원만하여 막히는 데가 없이 자비와 지혜를 충만하게 하는 대다라니를 깨치기 위해 청한다.

 

 

가. 관세음보살 찬탄【 1 】기도의 힘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呪)

원력홍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

천비장엄보호지(千臂莊嚴普護持)

천안광명변관조(天眼光明遍觀照)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呪)

‘계수(稽首)’란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이 뜻에서 귀의(歸依) 또는 귀명(歸命)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머리를 조아린다, 귀의 혹은 귀명한다는 뜻은 몸과 마음을 모두 던진다 혹은 바친다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자 하는 하심이 우선 되어 있어야 한다. 하심이 되어 있지 않은 경우 아무리 좋은 경전을 공부한다고 해도 교만한 마음에 가리어 참다운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깊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던 마음은 모두 모든 마음이 비워진 상태였다. 그와 같이 비우기 위해 우선 머리를 조아리고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머리를 조아리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치기 위한 수행법 중 하나가 절이다. 108배, 3천배, 만배 등 끊임없이 몸에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절을 하면 교만한 마음이 사라지고 하심이 되면서 참다운 불제자가 되는 원력(願力)이 생긴다. 이 길 가운데 해탈이 있고 열반이 있으며 정각(正覺)이 있다.

 

‘관음대비주(觀音大悲呪)’란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하신 마음이 깃들어 있는 신령스러운 주문이란 뜻이다. 곧 천수경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계수관음대비주(稽首觀音大悲呪)란 ‘거룩하시고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의 대비심이 깃들어진 이 천수경에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칩니다.’라는 뜻이다.

 

원력홍심상호신(願力弘深相好身)

원력(願力)앞에 원아(願我)가 생략되었다고 보고 해석한다. 계수관음대비주하는 수행자가 관세음보살님께 제가 원력을 넓고 깊게 가져 원력 따라 행하겠사오니 관세음보살님의 상호를 가진 몸으로 화련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라는 뜻이다. 즉 관세음보살님께서 넓고 깊은 원력을 세우시고 수많은 겁 동안 그 원력을 실행하여 거룩한 상호를 가진 몸을 이루셨으니 나도 그와 같이 넓고 깊은 원력을 세워 수많은 겁을 통하여 수행해야 할지라도 구경에 관세음보살님의 원력의 경계와 상호를 닮아가겠다는 수행자의 원력이다.

원력을 가진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사홍서원이나 여래십대발원문의 예를 봐도 그 원력이 얼마나 거대하고 거룩한가를 알 수 있다. 일체 중생과 허공을 가슴에 안고자 하는 원력이다.

 

천비장엄보호지(千臂莊嚴普護持)천안광명변관조(天眼光明遍觀照)

여기에서도 천비(千臂) 앞에 원아(願我)가 생략된 것으로 해석한다. 관세음보살님께 천개의 팔로 연약한 저를 장엄하여 주시고 필요한 것을 보급하여 주시며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항상 평등심을 유지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그리고 천안(天眼)의 광명(光明)으로 원력을 세운 저를 두루 살피시어 저에게 있는 모든 어두움을 밝혀주시기를 원하옵니다.

그리고 저도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많은 중생을 위해 천비장엄보호지하고 천안광명변관조 할 수 있는 보살로 화현할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앙원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무한한 위신력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동시에 기도를 통해 그와 같이 닮아갈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기도를 통해 얻지 못할 것이 없으며 자유자재의 문이 열림을 의미한다. 얻지 못할 것이 없고 자유자재한 문이 열린다 함은 기도를 지극정성으로 하면 첫째 업자재(業自在)해 진다. 기도를 하면 업이 녹아 내려 업장이 소멸된다. 기도를 하면 좋은 업을 짓게 되고,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좋은 업이 쌓이게 된다. 오랜 세월 기도를 계속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부처님 생각으로 가득차 입으로 나오는 말이 모두 부처님 말씀이고 생각과 행동이 모두 불사(佛事)의 업으로 승화된다.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면 부처님과 하나 되어 성불하지만 부처님을 잊어버릴 때는 악마와 하나 되기 쉬워 고통이 따른다.

 

둘째 심자재(心自在)하여 진다. 기도하는 작업은 부처님을 만나는 작업이다. 부처님을 만나 마음속에 부처님을 모시게 되니 어디를 가나 행복하고 부처님의 가피를 입으니 불가능이 가능하게 되고 마음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 마음이 항상 안정되고 여유로워지며 무한한 번창의 길이 열린다.

 

셋째 재자재(財自在)해 진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같아져 항상 베풀기를 좋아하니 그 공덕 하나하나가 모여 한없는 공덕이 쌓이게 된다. 한없는 공덕이 쌓인 부처님의 제자에게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를 해결할 재(財)가 따르게 된다. 우리들이 재물 때문에 곤경을 느끼는 것은 지은 바 복업(福業)이 자기의 필요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부처님 전에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이 맑아져 저절로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게 된다. 이렇게 올리는 정성이 곧 복업을 짓게 한다. 그래서 꾸준하게 기도하는 마음은 그 사람을 재물이 넉넉한 경계로 이끌어 간다. 궁핍 할수록 재물에 곤란이 있을수록 열심히 기도하면 실재로 이와 같은 경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넷째 명자재(命自在)하여 진다. 기도를 통해 마음 가운데 탁한 오염을 자꾸만 씻어내고, 죄를 짓지 않고 참된 마음으로 살아가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밖에 없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자재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3개월 전에 운명하실 때를 아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말씀드리고 물어볼 것이 있으면 부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물어보게 하시고 구시나가라 사라쌍수 나무 아래로 찾아 가셨다. 역대 조사들 가운데도 명을 자재하신 스님들이 계신다. 한 스님께서 그의 시자에게 초여름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 가야할 때가 되었나보다. 10월 달쯤 갈까한다.

 

시자가 대답하기를 스님은 아직도 건강하신데 왜 그렇게 빨리 가시려고 하십니까. 지금 건강해도 갈 때가 되면 가야 하느니라. 안 됩니다, 스님. 10월 달은 김장때라 그 때 돌아가시면 김장하기 바쁜 사람들에게 장례까지 치러야할 어려움을 줍니다. 어허, 그러면 김장 끝나고 가면 되겠구나. 아닙니다, 스님. 김장이 끝난 후 가시면 날씨가 너무 추워 장례 치루기 위해 사람들을 너무 고통스럽게 합니다. 어허, 그러면 봄에 가면 되겠구나. 시자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스님은 그 이듬해 입춘을 넘기고 대중 스님들을 모아 놓고 이제 가도 아무도 말할 사람 없겠지 라고 하시며 제행무상법문을 하시고 떠나셨다한다.

 

다섯째 생자재(生自在)해 진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그의 정성에 맞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 그러하니 내생에 복 있게 태어나려면 금생에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 부유하고 고귀한 집안에 태어나는 경계가 모두 생자재(生自在)이다. 부처님은 도솔천에 계시면서 생모를 택하시고 마야부인에게 태몽으로 그 소식을 알려 드렸다고 한다.

 

노화(老化)되어 병든 몸으로 병원에 가서 수술하고 고통 속에서 한 해 두 해 더 오래 살려고 하기보다 평소에 대비주기도 지극정성으로 하여 가야 할 때 가서 생자재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머리 숙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기도를 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관세음보살 찬탄【 2 】무위심(無爲心)의 위력

 

진실어중선밀어(眞實語中宣密語)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속령만족제희구(速令滿足諸希求)

영사멸제제죄업(永使滅除諸罪業)

 

진실어중선밀어(眞實語中宣密語)

문장의 내용으로 보아 ‘진실어’ 앞에 원아(願我)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관세음보살님, 제가 진실한 말을 하게 되고 그 말 가운데 비밀스럽게 가피를 내리는 말이 퍼져나가기를 원하옵니다.’

 

업장이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진실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관세음보살님의 진실한 말을 할 수 있고, 그 말씀 속에 대중에게 이익이 되는 비밀스런 말씀이 있는 자기로 승화시키는 원을 발하는 것이다. 즉 관세음보살님을 닮아 진실어중선밀어하는 자기로 승화하기를 원한다.

 

관세음보살님의 말씀은 참다운 열매이다. 관세음보살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법(法)이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자는 무한한 영광과 번영을 가져오는 비밀스런 말씀을 느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관세음보살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고 마음의 귀가 열리지 않아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만 비밀스런 말씀의 가피를 입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

여기에서도 ‘무위심’ 앞에 원아(願我)가 생략되었다고 본다. ‘관세음보살님, 제가 관세음보살님을 닮아 무위심의 경지에 이르고 그 무위심에서 대자대비한 마음이 일어나기를 원하옵니다.’

 

무위심(無爲心)이란 관세음보살님의 마음과 같이 전혀 오염이 없는 청정한 마음이다. 오염이 있는 마음, 부정(不淨)한 마음은 ‘나’가 있는 마음이다. ‘나’가 있는 마음은 아상(我相)이 있게 되고, 아상이 있는 마음은 자기를 위해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게 되고,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기심을 일으켜 욕심을 일으키고, 욕심은 집착을 불러온다. 집착은 불만을 가져오고 불만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가 있는 마음은 탐욕에 물들기 쉽다. 베풀기를 싫어하고 끌어 들이기를 좋아하는 마음이니 병든 마음이다. 이와 반대로 무위심(無爲心)은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마음이다. 청정한 마음은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으로 베풀기를 좋아하는 마음이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마음이므로 무위심(無爲心) 가운데 대비심(大悲心)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무위심이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인 것과 같이 중생을 거두어 주시는 대비심도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이다. 이와 같음으로 관세음보살님의 마음을 닮아 가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기도’하면 그 공덕으로 청정한 무위심을 이루게 되고, 무위심에서 관세음보살님의 대비심이 솟아나 무한한 공덕을 쌓는 마음이 된다.

 

속령만족제희구(速令滿足諸希求)

‘속령만족’ 앞에 원아(願我)가 생략되었다고 본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저로 하여금 제가 희망하고 구하는 바가 모두 하루 속히 만족되도록 하여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저로 하여금 관세음보살님을 닮아가기 위해 제가 희구(希求)하는 바, 진실어중선밀어(眞實語中宣密語)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를 모두 하루 속히 이룰 수 있게 하여주소서라는 원이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가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반드시 좋은 수확을 하게 되지만, 씨도 뿌리지 않고 밭을 갈지도 않는 사람이 수확만 많이 거두려고 하면 괴로운 일만 생긴다. 씨를 뿌리고 밭을 가는 사람의 마음은 무위심이고 무위심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받아 모든 원하는 바를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지만, 씨를 뿌리지도 않고 밭을 갈지도 않고 수확만 많이 하려는 사람은 유위심(有爲心)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탐욕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라 괴로움과 질병이 따르게 된다.

 

영사멸제제죄업(永使滅除諸罪業)

‘영사멸제’ 앞에 원아(願我)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 관세음보살님께서 저의 모든 죄업이 영원히 소멸되고 제거될 수 있도록 하여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옵니다.

 

무위심을 닦는 사람은 마음 가운데 모든 번뇌 망상을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 머리를 숙이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는 사람은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입어 수많은 겁을 지내오면서 쌓아온 모든 죄와 업장이 한꺼번에 소멸된다. 죄가 소멸되지 않았을 때는 유위심의 마음이니 죄와 업장이 모두 소멸되어야만 청정한 마음을 이루게 되고, 청정한 마음이 곧 무위심이다. 무위심에서 대비심이 일어남으로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 부처님의 마음을 이루면 이 세상에 이루지 못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마음이 된다.

 

 

 

관세음보살 찬탄【 3 】삼매(三昧)의 신통(神通)

 

천용중성동자호(天龍衆聖同慈護)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薰修)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

수지심시신통장(受持心是神通藏)

 

천용중성동자호(天龍衆聖同慈護)

지극한 기도로써 모든 죄와 업장을 소멸한 사람은 하늘의 용과 많은 성현(聖賢)들의 자비하신 보호를 한 없이 받는다는 뜻이다. 천용 팔부 신장님들의 보호를 받는 것은 보호를 받는 사람의 그릇 따라 받는다. 그릇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보호를 받으나 그릇이 다른 물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화엄신장님들께서 자비하신 보호를 내려주시려 해도 받을 틈이 전혀 없는 것이다. 파이프가 막히면 물이 흘러들어갈 수 없듯이 신장님들의 보호의 기운이 전혀 통할 수 없이 막힌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사람들은 악귀와 액운이 따르는 사람들이니 몸과 마음을 다하여 ‘화엄성중’기도나 ‘관세음보살’ 기도를 꾸준하게 하여 막힌 구멍을 뚫고 그릇을 한 없이 키워야한다. 천용 팔부 신장님들은 이 우주에 가득하다. 그들은 부처님의 제자들을 악귀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소임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진실한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노력을 다하면 그들은 항상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자비하신 원력으로 보호하여 소원성취를 하게 하신다.

 

백천삼매돈훈수(百千三昧頓薰修)

막힌 파이프를 단번에 뚫는 힘이 백천삼매돈훈수이다. 삼매에는 정삼매(正三昧)와 사삼매(邪三昧)가 있다. 사삼매는 당구나 노름 같은 일에 열중하는 것으로 영원성이 없는 삼매이고, 정삼매는 기도를 정성들여 꾸준히 오랜 세월 하게 되면 마치 깊고 넓은 저수지에 물이 고이듯 정신력의 저수지가 형성된다. 저수지 수문을 열면 강력한 수압을 가진 물이 터빈을 돌려 발전시키듯 정신력의 저수지 수문을 열면 막힌 파이프 구멍을 확 뚫고 정신력의 물이 다시 막히는 일 없이 영원히 자유자재로 흐르게 하는 경지를 삼매돈훈수라 하는데 저수지에 물이 고이는 과정을 향기와 같이 은은히 스며든다고 하여 훈수(薰修)라 한다. 이와 같이 흐르는 물은 수천가지로 이용될 수 있으므로 그 용도에 따라 백천삼매돈훈수라 한다. 백천삼매돈훈수가 되면 모든 죄와 업장이 소멸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 수지심시신통장(受持心是神通藏)이 되는 것이다. 즉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이 열리는 것이다.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

몸에는 광명(光明)의 깃발을 받아 지녔다고 했다. 백 천 가지 삼매에서 깨달은 바를 실천하여 보니 삼매에서 깨달은 것들이 모두 진실임을 확신하게 되어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본인이 체험한 바를 중생에게 알리고자 하는 강력한 원력은 광명으로 샘솟아 깃발을 들고 조금도 구애됨이 없이 자신 있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니다. 그 동안 공부 한 바를 중생을 위해 아낌없이 전법하는 깃발이다.

 

수지심시신통장(受持心是神通藏)

마음에는 신통(神通)의 보고(寶庫)를 받아 간직했다고 했다. 백천삼매돈훈수한 마음은 곧 신통 그 자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신통(神通)이란 말은 신령스러운 힘과 통하는 경계를 의미하고, 신통력이 자재한 여섯 가지 경계를 부처님의 경계라 한다.

첫째, 신족통(神足通)이란 세 가지가 있는 데, 첫째는 생각하는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경계, 둘째는 마음대로 상(相)을 바꿀 수 있는 변화무쌍의 경계, 셋째는 외계(外界)의 대상을 마음대로 하는 수의자재(隨意自在)의 경계이다. 수의자재(隨意自在)의 경계는 현재까지 부처님만이 할 수 있었던 경계로 성여의(聖如意) 경계라고도 한다.

둘째, 천안통(天眼通)은 우주 법계를 망라해 모든 것의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경계를 말한다.

셋째, 천이통(天耳通)은 우주 법계를 망라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경계를 말한다.

넷째, 타심통(他心通)은 타인의 마음 속 모든 선악의 작용을 꿰뚫어 아는 경계를 말한다.

다섯째, 숙명통(宿命通)은 자타(自他)의 과거세의 생존 상태를 모두 아는 경계를 말한다.

여섯째, 누진통(漏盡通)의 누진(漏盡)은 번뇌가 다 흘러버리고 더 이상 흐를 것이 없음을 의미하니 누진통은 두 번 다시 미계(迷界)에 태어나지 않는 경계를 말한다.

이들 여섯 가지 신통을 육통이라 하고, 육통 중 천안, 숙명, 누진의 3통을 삼명(三明)이라 하며, 합하여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한다. 육신통은 모두 혜(慧)를 본질로 하고, 그 중 누진통을 제외한 5신통은 사선(四禪)을 닦음으로서 증득하므로 성자뿐만 아니라 범부도 닦을 수 있다한다. 누진통은 부처님만이 체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찬탄【 4 】지혜의 방편문(方便門)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

아금칭송서귀의(我今稱誦誓歸依)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세척(洗滌)이란 씻어버린다. 진로(塵勞)란 티끌 수만큼 많은 노고(勞苦)이니 괴로운 번뇌 망상이다. 제(濟)가 건널 제이므로 원제해(願濟海)는 바다를 건너기를 원한다. 괴로운 번뇌 망상을 씻고 또 씻어 마음이 가볍고 맑고 밝아지도록 바다를 건너 사바세계에서 열반의 세계에 가기를 원한다. 그러면 괴로운 번뇌를 어떻게 씻을 것인가? 대비주를 간절히 염송(念誦)한다든지, 천수경 전체를 지극한 정성으로 외우고 사경하고 부처님께 공양올리고, 사수관을 지극히 하여 과거에 지은 업을 찾아 소멸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결국 번뇌 망상을 씻어버리고 바다를 건너 사바세계에서 열반의 세계에 가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

초(超)는 뛰어 넘는다는 뜻이고 증보리(證菩堤)는 보리, 깨달음을 증득한다는 뜻이다. 합하면 깨달음을 증득함을 초월하였다는 뜻이니, 증득함을 초월한다는 것은 증득하였다고 만족하지 아니하고 증득하였어도 증득하였다는 생각 없이 계속 기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방편문(方便門)이 열린다는 의미가 된다. 방편문이 열린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자유자재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아이디어, 지혜가 한 없이 샘솟아나는 문이 열린다는 뜻이다. 보리를 얻었어도 그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기도를 계속해 나아가면 무진장한 지혜가 필요에 따라 저절로 솟아남을 말씀하고 있다.

 

아금칭송서귀의(我今稱誦誓歸依)

칭(稱)은 부르다 칭찬하다이고 송(誦)은 외다 암송하다이다. 초증보리방편문을 꼭 성취하고 말겠다는 대원을 세우고 대비주기도에 전념(專念)하는 것이 칭송(稱誦)이고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다라니를 일념으로 외는 가운데 진실어중선밀어(眞實語中宣密語)를 몸소 느껴 한없는 신심(信心)이 쌓이게 되고 정진하는 마음은 더욱 굳어져 관세음보살님께 감사하고 관세음보살님께 맹세코 귀의하리라는 마음이 강력히 표출된다. 이 뜻이 서귀의(誓歸依)이다. 이 마음은 관세음보살님을 닮아가고 관세음보살님과 하나가 되어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 길만이 나의 존재를 바로 깨닫고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게 한다는 신념이다.

 

소원종심실원만(所願從心悉圓滿)

소원(所願)은 원하는 바이고, 종심(從心)은 마음 따라 이며, 실(悉)은 다하다, 다 갖추다 이니 실원만(悉圓滿)은 원만하게 모두 이루어지이다 이다. 모두 합치면, 관세음보살님, 저의 소원하는 바가 저의 마음 따라 모두 원만히 이루어지게 하여 주소서가 된다. 기도하는 마음이 굳어지고 발심하여 관세음보살님님께 귀의할 것을 맹세하면 소원하는 바가 마음 따라 모두 원만히 성취된다는 뜻이다.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하여 모든 번뇌 망상을 깨끗이 씻고 이 사바세계에서 바다를 건너 열반에 갈 원을 세우고, 끊임이 없는 기도를 하여 어떠한 번뇌도 지혜의 문을 가리지 않게 하면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堤方便門)을 하게 된다. 보리도(菩提道)를 깨달았어도 깨달은 줄 모르고 계속 정진하다 보면 지혜의 문, 방편문이 열려 필요한 모든 아이디어가 필요에 따라 샘솟아 올라옴에 관세음보살님을 찬탄하고 귀의할 것을 맹세하게 되며, 모든 것이 마음 따라 원만히 이루어진다고 했다.

 

 

나.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1 】기도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知慧眼)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의 나무는 ‘나모 namo’라고도 발음하는데 그 뜻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귀의합니다 이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다 비워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이다. 기도의 극치의 대명사가 ‘나무’이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다 비워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는 마음이 우러나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수많은 번뇌들이 다 녹아내려 세척진로(洗滌塵勞)되어서 바다를 건너는 일체법을 신속하게 알게 된다.

 

일체법(一切法)이란 광대무변한 우주의 법칙이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의 법칙을 부처님께서 망원경이나 어떤 기계를 가지고 우주의 법칙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마음 안에서 이 우주는 가가 없는 천체(天體)인 것을 아시고 그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법을 깨치셨다. 현대과학에서 인력(引力)이나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같은 법칙을 부처님은 연기법(緣起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불교의 우주관이다. 그리고 이 법칙에서 인간이 고통 받는 원인과 극락세계로 가는 일체법을 아시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광대무변한 우주의 법칙을 포함한 모든 법은 부처님의 마음 안에 있었으므로 우리 인간의 마음의 법, 즉 심법(心法)안에 있다. 따라서 일체법을 알고자 한다는 말의 뜻은 우리들의 심법(心法)을 알고자 한다는 의미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광대무변한 우주의 법칙을 깨닫고 심법(心法)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오염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오염에 가리어 절대로 만법을 볼 수 없다. 우주의 법칙을 깨닫기를 원하는 사람은 우선 마음속에 모든 오염된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일념으로 기도해야 한다.

내가 받는 모든 고통과 번뇌의 원인이 되는 일체법을 알고자 하니 이는 집제(集諦)에 해당된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知慧眼)

지혜안(智慧眼)이란 탁월하고 걸출한 아이디어를 내는 눈이다. 가정생활에서나 직장 일이나 사업에서나 걸출한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고 자기에게도 이익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 학생도 마찬가지 이다. 아이디어가 있는 학생이 우수할 수 있다. 지혜의 장애는 번뇌 망상이다. 번뇌나 망상에 가려지면 지혜가 샘솟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체법을 알기 위해 세척진로를 해야 하고, 일체법을 알게 되면 지혜의 눈이 열린다. 그러므로 지혜의 눈의 열쇠는 일체법을 아는 것이고, 일체법을 아는 열쇠는 세척진로이다. 세척진로의 열쇠는 ‘나무대비관세음’을 염송하는 오직 일념의 기도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이 우주의 법도를 알아야 한다. 법도를 모르고 함부로 살아서는 재앙, 고통, 실수, 질병의 장애를 면할 수 없다. 시험 답안을 쓰는데도 길이 있고 요령이 있듯이 이 세상을 살아감에도 우주의 법도에 따라 살아가는 길이 있고 요령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맑고 밝은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길이 보이고 요령이 생기는 법이다.

 

법도란 무슨 말인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선문답이 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일체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인데 이 말은 내가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픈 것이 자기만 그런 줄 알고 자기 배만 채우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누구나 다 배가 고플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누어 먹으려고 하는 사람은 만법을 아는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일체법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이치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 생명이 귀한 줄 알고 자기만 살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자기 생명이 자기에게 제일 귀하다면 일체 중생이 다 각기 자기 생명을 제일 귀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 할 줄 아는 사람은 만법을 아는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이다.

 

‘나무대비관세음’을 염송하는 사람이 지혜의 눈이 빨리 열리게 되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이다.

나의 앞에 놓여 있는 고통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얻고자 함으로 이는 바로 고제(苦諦)이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2 】지혜 방편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

‘나무대비관세음’하며 기도하는 일념은 우주의 일체법을 깨닫게 하고 그에 따라 응용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을 열리게 한다. 이와 같이 ‘나무대비관세음’을 염송하는 사람은 마음을 텅 비우게 되니 사리사욕(私利私慾)에 물들었던 이기심이 녹아 사라진다. 이기심은 번뇌의 뿌리이기 때문에 이기심이 소멸됨에 따라 일체중생이 두루 하나임을 깨닫게 되어 마음이 넓어지고 포용력이 생겨 일체중생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원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원을 성취하게 하는 지혜 방편의 문도 넓어진다.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이 원이 하나의 구호에 불과한 경향이 있다. 병든 이나 괴로운 일이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해 위로하고, 시카고에서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현실에 맞는 중생구제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문제에 좀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목숨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을 하루 속히 제도(濟度)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나보다도 더 심한 고통의 바다에 빠진 중생들의 고통을 제도(濟度)하고자 하니, 곧 도제(道諦)이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

일체중생을 속히 제도하겠다는 대원을 세웠으니 그 원을 성취할 수 있는 방편이 필요하다. 방편은 마음을 비우고 사는 사람에게 나온다. 마음을 비우는 사람에게는 번잡한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음으로 장애를 받지 않는다. 마음을 비우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에 제도를 받아야 할 중생 입장으로 생각이 바뀐다. 그 중생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를 도울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가운데 그에 필요한 응용력이 생겨 그 중생을 제도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전기제품, 전자제품, 공구(工具), 기계, 자동차, 비행기, 발전소, 전기, 통신, 의학 등 다양한 면에서 이들을 연구한 사람들은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상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면 될 수록 그 상품은 더욱 유명해 진다. 이들을 개발함에 필요한 응용력이 선방편(善方便)이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함에 필요한 지혜력이 선방편이다. 어느 쪽이나 자기를 비우고 상대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선방편이 나온다. 그러나 상대를 위하기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체우고자 하는 마음에는 악방편(惡方便)이 생긴다. 악방편은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잘살아야 하는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중생들에게 해(害)가 되며 자신의 죄업장을 더욱 중(重)하게 하여 결국 고통의 길로 가게 된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목숨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훌륭한 방편을 하루 속히 얻게 하여 주소서.

고해(苦海)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훌륭한 방편을 얻고자 함으로 도제(道諦)에 해당된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3 】부처님의 나라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의 반야선(般若船)은 부처님의 나라로 가는 배이다. 이 반야용선(般若龍船)만 타면 부처님 나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기차를 타든 배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그 급에 따라 대가를 치루 듯 반야용선을 타는데도 그 급에 따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잠시도 함부로 살지 말고 천수경이나 대비주를 항상 염하여 관세음보살님을 마음속 깊이 모시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항상 이어가는 것이다. 즉 천수경 독경과 대비주 염송이 바로 반야선에 승선(乘船)하는 것이므로 업장이 소멸되고 대 방편의 지혜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반야선에 타기만하면 반야지혜가 샘솟듯 솟아나는 배인지, 반야를 향해가는 배인지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반야지혜가 샘솟듯 솟아나는 배이라면 고해(苦海)를 이미 건너간 상태이므로 여기에서의 반야선(般若船)은 반야를 향해 가는 배라고 봄이 옳다고 생각된다. 반야를 향해 가는 배라면 모든 번뇌 망상을 씻어내는 대비주를 전념으로 암송하는 단계가 반야를 향해가는 배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열반의 세계로 가는 반야선(般若船)을 하루 속히 탈 수 있게 하여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중생을 고통에서 해탈하게 하는 도(道)는 반야지혜이니 이는 곧 도제(道諦)이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

앞의 구절에서 반야선을 탔으니 고통의 바다를 하루 속히 건너기를 원한다. 위에서 탄 어떠한 교통편을 이용하더라도 도중하차하여 다른 볼 일을 보게 되면 그 교통편을 놓치게 되는 것과 같이 천수경, 대비주, 혹은 어떤 진언을 택하여 염송하는 도중 염을 놓치면 반야선에서 내린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와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게 된다. 고통의 바다를 하루 속히 건너 부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반야용선을 탔다고 교만하거나 안심하지 말고 대비주를 염송하는 마음을 잠시도 놓치지 않으면서 하루하루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금생에 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 부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금생에 고통의 바다를 건너기 어려울 것이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이 고통의 바다를 하루 속히 건너게 하여 주소서.

반야지혜로써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으니 이 또한 도제(道諦)이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4 】계정혜(戒定慧) 3학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반야용선을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 부처님의 나라에 가고자 대비주를 외우는 사람의 자격요건이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다. 수행자로서 계(戒)를 지키지 못하면 정(定)과 혜(慧)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계를 바르게 지키면서 천수경을 열심히 독경하고 대비주를 일념으로 염하는 사람은 정을 이룰 수 있고, 정이 깊어지면 혜가 따른다. 이 혜가 곧 원적산(圓寂山)이고 부처님의 나라이다.

계를 잘 지킨다는 뜻은 내가 계를 잘 지키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남이 계를 지키지 못하였을 때 그를 비방하거나 하열한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취급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계를 바르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요 그를 도와서 계를 지키도록 인도하여 주는 것은 나의 계를 내가 바르게 지키는 것이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계정혜(戒定慧)를 닦는 도(道)를 하루속히 얻게 하여 주소서. 반야지혜는 계정혜 삼학을 닦는 수도(修道)에서 나온다. 이 때 계(戒)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이 포함되니 역시 도제(道諦)이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원적(圓寂)이 되면 그 곳이 곧 부처님의 자리이므로 원적산(圓寂山)이라 하면 부처님이 계신 산이라 할 수 있으니, 부처님이 계신 산에 하루 속히 오르고자 하는 원이다. 즉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원이다.

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원만하고 고요한 부처님이 계신 산에 하루 속히 오르게 하여 주소서. 원적산(圓寂山)에 오른다는 것은 등산할 때 산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봉우리까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오르듯이 계정혜 삼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닦아 반야지혜를 일으키는 원적(圓寂)에 오른다는 뜻이니 이 또한 도제(道諦)이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 【 5 】부처님의 몸과 마음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무위사(無爲舍)라 함은 부정(不淨)한 것이 없는 깨끗한 집이니 부처님의 집이다. 나를 위해 구하는 것이 있거나 욕심을 내는 것은 유위(有爲)이고 부정(不淨)한 것으로 보지만 나의 상대를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하는 행위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므로 무위(無爲)이고 청정한 행위이다. 오직 중생 구제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신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이 무위사이다. 그러하니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는 하루 속히 부처님의 집에서 모두 함께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대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부처님의 집에 하루속히 도달하게 하여 주소서. 부처님이 계시는 집에 도달하니 이는 멸제(滅諦)이다.

 

원적산(圓寂山)과 무위사(無爲舍)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 한 실화 예를 들고자 한다. 제가 화계사 불교대학에서 강의 할 때 한 보살이 저를 찾아 왔는데 그 때 그 분은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 차 붉은 색에 검정 색이 섞여 있는 정도였다. 사연인즉 결혼을 해 아들 둘을 놓은 후 어떻게 하다 자기 남편이 자기와 만나기 전에 결혼을 했었고 전 처와 이혼한 남자였는데 남편에게 속은 것이 너무나 억울하여 이혼을 하려도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 이혼도 할 수 없고 자기를 속인 남편이 너무나 미워 자기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20년이 가까이 되다보니 자기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는데 자기 친구가 화계사 불교대학에 현성스님 강의를 들어보라고 해서 한 학기 들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면서 위와 같은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 하면서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해야 술을 끊고 대학 입시를 앞둔 아들을 좀 돌볼 수 있겠는가고 문의 하였다.

 

나는 그 보살에게 불교에서 경영하는 장애자 복지회가 있는데 그 곳에 가서 자원 봉사를 한 주에 한 번 씩 할 것을 권하였다. 그는 이 권유를 받아 들여 그 복지회에 가 보니 장애자 목욕시키는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하여 그렇게 정하고 왔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보살이 한 달 이상 장애자를 목욕시키는 봉사를 하면서 자기가 만일 술을 계속 마시다 풍이라도 맞아 이와 같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 남편이 전 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건강하지 않는가? 만일 전 처가 없는 대신 무슨 사고로 불구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등 등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감자기 남편에게 감사한 생각 아들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알코올 중독자라고 화 한 번 내지 않고 자기를 위로 주었던 자기 남편,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아들들에게 너무 큰 죄를 지어 가며 살았던 자기를 발견하게 되어 부처님에게 끝없는 참회를 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남편과 두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부인이 되고 어머니가 되었다.

 

여기에서 남편이 잘 못한 것을 탓하며 남편을 끝까지 용서하지 못하는 행은 자기를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남의 잘못을 용서해야 하는 계를 어기며 자기 생각 속의 삶을 살아 온 것이다. 여기에는 번뇌도 많고 망상도 많은 삶이다. 그러나 남편의 과거 잘못을 이해하고 남편이 건강한 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고 오직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은 무위심(無爲心)이요 모든 근심 걱정을 떨쳐버린 적정(寂靜)한 삶 즉 원적산에 가까운 것이다.

 

나무대비관세음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법성(法性)은 법신(法身)의 성품이고 법신은 진여(眞如)이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각(覺)의 본체이다. 이를 우리는 참된 부처라 부른다. 조동(早同)은 빨리 같게 한다는 뜻이니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은 하루속히 부처님과 같은 몸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성불(成佛)하고자 하는 원을 발원하는 것이다.

 

법성신(法性身)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내가 내 밖에 계시는 부처님의 법성신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는 뜻도 아니고, 내 자신에게 법성이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서 법성신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원래 무시이래로 내 자신에게 이미 있는 법성신을 일깨워 일으켜서 불생불멸하는 참나, 본래의 법성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법성신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다. 즉 참나와 법성신은 같은 하나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법성신을 일깨워 일으키는 방법은 여래 십대 발원문 중 앞 아홉 가지를 차례로 닦아 성취하면 열 번째 법성신이 내 자신에서 저절로 발현(發現)되는 것이다.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오니 원하옵건데 이 법계의 일체중생과 더불어 법성신(法性身)과 하루 속히 똑 같게 하여 주소서. 법성신(法性身)과 똑같이 되기를 원하니 이 또한 멸제(滅諦)이다.

 

관세음보살 십대원(十大願)은 가장 아름답게 묘사된 위대한 발원문이다.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은 기도하는 사람의 가장 지극한 마음을 표하고 있다.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오니’ 이 얼마나 지극하고 간절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이와 같이 되어야 하고 또 꾸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지극한 마음으로 꾸준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속에서 자신과의 만남을 이루어 이 우주의 일체법을 깨닫게 되니 원아속지일체법(願我速知一切法)을 이루게 된다. 일체법을 깨달아 그를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생기니 원아조득지혜안(願我早得智慧眼)을 이루게 된다. 지혜의 눈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고 그를 제도하여 주니 원아속도일체중(願我速度一切衆)을 이루게 되지만, 일체중생을 제도하다 보니 여러 가지 좋은 방편이 필요한데, 지혜를 가진 눈으로 많은 중생을 제도한 공덕으로 훌륭한 방편을 항상 얻게 되니 원아조득선방편(願我早得善方便)을 이룬다. 좋은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다 보니 모두 함께 부처님을 친견하러 가고자 한다. 친견하러 가기 위해 배편을 마련하여 그를 타고 대비주를 간절한 마음으로 염하니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을 이루고, 부처님의 나라로 가는 반야용선을 타고 대비주를 일념으로 염하며 고해(苦海)를 건너니 원아조득월고해(願我早得越苦海)를 하게 된다. 고해를 건너니 계정(戒定)이란 이름을 가진 길이 보인다. 이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라는 길을 따라가니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를 하게 된다. 이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니 부처님이 계시는 원적산(圓寂山)이 보인다. 그 원적산의 산정(山頂)에 오르니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하게 된다. 원적산(圓寂山)에 도달하고 보니 부처님이 사시는 무위(無爲)라는 이름을 가진 집이 보인다. 이 집에 모두 함께 들어가니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를 하였다. 부처님이 사시는 무위 집에 들어갔으니 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 부처님을 친견하여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을 하고 보니 내 밖에 있는 부처님과 내가 같아진 것이 아니라, 법성신 즉 부처님은 원래부터 내 마음 안에 있는 법성이고 이 법성신이 곧 나의 불성(佛性)이었음을 깨달아 나의 불성으로 돌아와 하나가 되었다. 내 마음 안에 불성(佛性)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성불(成佛)할 수 있는 소질(素質)을 가지고 있다. 불성이 없다면 성불은 불가능하다.

기도를 통해 성불하는 단계가 너무나 아름답게 그리고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래 십대 발원문에서 관세음보살 대비주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무장되어 법성신과 하나 되고 이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되는 수행자가 되었을 때 아래와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다. 육향육서(六向六誓)【 1 】업장소멸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도산자최절(刀山自摧折)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 화탕자소멸(火湯自消滅)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 지옥자고갈(地獄自枯渴)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 도산자최절(刀山自摧折)

내가 도산(刀山)을 향해 가면 도산은 저절로 최절(摧折)한다. 도산(刀山)은 칼날로 된 지옥 산이다. 이 산이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다. 남을 콕콕 찔러 아프게 하기를 좋아하고 남이 아파서 괴로워하고 비명을 올리는 것을 보고 고소해 하는 이상한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부부간에도 작용하고 남과도 작용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칼날로 찌르듯 괴롭히는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느 날 내가 문뜩 남을 찌르기를 좋아하는 칼날을 품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그를 참회하고 칼날 같은 성질을 소멸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지극한 마음으로 천수경 또는 대비주 기도를 하고 참회하는 것이 아약향도산(我若向刀山)이고, 이렇게 하면 칼산지옥의 업장이 소멸되어 마음이 평정되어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보다 편안하게 해 주기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변한다는 뜻이 도산자최절(刀山自摧折)이다.

 

반대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남이 나에게 대하는 짓이 마치 칼로 나의 온 몸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주는 것이 칼산지옥이다. 이러한 칼산지옥이 설사 남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칼날이 나를 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즉시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힘에 의하여 칼산이 저절로 꺾여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지극 정성으로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열심히 기도하여 법성신과 하나 되어 부처님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에게는 남을 해치는 칼산이나 나를 해치는 칼산이 이미 모두 꺾여 버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관세음보살의 대비주로 장엄한 나는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나를 괴롭히기보다 모두를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확신]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 화탕자소멸(火湯自消滅)

화탕(火湯)은 불에 끓는 탕이니, 내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그의 속이 끓어 올라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이 붉어졌다가 노래지고 다시 검어진다든지, 내 마음이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가 나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날 내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그를 화탕지옥에 빠지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든지, 혹은 내가 화를 내, 속이 끓어 열이 나서 숨을 쉬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음을 알았을 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대비주염송을 일념으로 하는 것이 아약향화탕(我若向火湯)이고 대비주를 염함으로서 화난 불이 꺼지고 끓어오르던 열기도 저절로 소멸되어 평정을 이루어 편안한 마음이 되어버리는 것이 화탕자소멸(火湯自消滅)의 의미이다.

 

그리고 평소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지극 정성으로 하겠다고 결심하고 대비주 염송을 끊임없이 하여 법성신과 하나 되어 관세음보살님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에게는 남을 해치는 화탕(火湯)이나 나를 해치는 화탕이 이미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항상 관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면 재앙을 면할 수 있음을 믿음]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 지옥자고갈(地獄自枯渴)

지옥(地獄)은 내 마음이나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지옥이 있는데 그 중 칼산지옥과 화탕지옥 외 모든 지옥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요즈음 흔한 스트레스 병도 이 지옥이라고 볼 수 있다. 여자나 남자와의 애정관계를 이중 삼중으로 맺은 결과로 생기는 헤어나기 어려운 지옥, 남편이 바람피워 아내의 속이 상하는 지옥, 아내가 바람피워 남편의 속이 상하는 지옥, 자녀가 불행해져 부모 마음이 상하는 지옥, 수년 전에 자신이 잘못한 실수가 이제 들어나 남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어 어쩔 수 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지옥 등, 수 없이 많은 업장(業障)으로 생긴 지옥들이 있다. 아무리 난처한 지옥이라 하더라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 몸과 마음 다 바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일념으로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끊임없이 대비주기도를 하는 것이 아약향지옥(我若向地獄)이고, 대비주 기도를 통해 그 지옥이 저절로 말라 없어져 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얻어 편안해 지는 것이 지옥자고갈(地獄自枯渴)의 뜻이다.

그리고 평소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지극 정성으로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끊임없이 대비주 기도를 하여 법성신과 하나 되어 부처님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에게는 남을 해치는 지옥(地獄)이나 나를 해치는 지옥이 이미 모두 다 말라 버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지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의 대비주의 힘이 지옥을 소멸할 능력이 있음을 믿음]

 

 

육향육서(六向六誓)【 2 】업장소멸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

아약향축생(我若向畜生) 자득대지혜(自得大智慧)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

아귀(餓鬼)는 육도윤회하는 중생 중 배고픈 귀신인데,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른다. 항상 배가 고프니 먹을 것만 찾아다닌다. 이 귀신이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다. 내 마음 안에 있는 이 귀신은 항상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지만 너무 욕심이 많아 배부른 줄 모른다. 예를 들면 욕망이 분에 넘치고 허영심이 많아서 아무리 돈이 많고 명예가 높아도, 부자 동네 호화로운 주택에다 고급차를 타고 다니며 살아도 항상 부족하니 불만이 가득하다. 참으로 배고픈 사람이 먹어야 할 것도 뺏어 먹는 귀신이다. 어느 날 어떤 인연으로 자기의 이익만 챙기려는 탐욕의 귀신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참회하고 그 귀신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기 위한 결심을 하고, 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하는 것이 아약향아귀(我若向餓鬼)이고 대비주를 염송함에 의하여 배고픈 귀신의 배가 먹지 않아도 저절로 불러 더 이상 배고픈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아귀자포만(餓鬼自飽滿)의 뜻이다.

 

자기가 가난하게 살고 있다고 항상 부족한 것에 대하여 불만하던 어떤 여인이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대비주 기도를 지극 정성으로 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돈이 자기보다 훨씬 많은 다른 사람들이 고혈압, 당뇨병, 송사(訟事) 등으로 고생하는데 자기 식구들은 모두 건강하고 자녀들도 공부 잘하며 잘 자란다는 생각이 들자 가난하다는 생각이 찰나 사이에 없어지고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만 가지게 되었다 한다. 기도는 이와 같은 신묘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평소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지극 정성으로 하여 법성신과 하나 되어 부처님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에게는 내 배를 불리고자 남을 해치는 아귀 같은 마음이 이미 모두 다 포만(飽滿)하여 처음부터 탐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타(自他)의 탐욕]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

아수라(阿修羅)는 화를 잘 내고 싸움을 좋아하는 귀신이다. 부부사이에 싸움하기를 좋아한다든지, 한 단체 안에서 파를 갈라 서로 싸우기를 좋아한다든지, 단체와 단체 간, 기업과 기업 간, 정당과 정당 간, 나라와 나라 간에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다투기를 좋아하고 전쟁을 일으켜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 아수라의 마음이다. 이러한 아수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 단체와 나라가 편할 수 없다. 어느 날 남을 해치는 아수라의 마음이 바르지 못함을 깨닫고 아수라의 마음을 조복받기 위한 결심을 하고, 내 몸과 마음 다 바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를 염송하는 것이 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이고 대비주 기도를 지극히 하여 아수라의 악한 마음이 저절로 조복(調伏)되는 것이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이다.

그리고 평소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지극 정성으로 하여 법성신과 하나 되어 부처님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에게는 남과 다투기를 좋아하고 싸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타(自他)의 진에(瞋恚)]

 

아약향축생(我若向畜生) 자득대지혜(自得大智慧)

축생(畜生)이란 동물이나 벌레이다. 내 마음 속에 지혜롭지 못한 동물의 마음이나 벌레의 마음이 있다. 정신병원에 가보면 이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의 말 속에도 ‘저 사람은 돼지보다도 못하고 개만도 못하다’는 참혹한 말이 있다. 실제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동물의 어리석은 마음이 숨어 있다. 뱀의 마음도 있고, 여우의 마음도 있으며, 쥐의 마음도 있고, 고양이의 마음 등이 있다. 이러한 마음은 육체의 욕구밖에 채울 줄 모르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마음이 자기의 지혜를 가리고 있음을 깨닫고 어리석은 마음을 소멸하고자 하는 원을 세우고 몸과 마음 다 바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를 염하는 것이 아약향축생(我若向畜生)이고 대비주를 염송함에 따라 축생의 마음은 사라지고 저절로 대지혜(大智慧)를 얻는 것이 자득대지혜(自得大智慧)이다.

그리고 평소에 천수경을 외우고 대비주 기도를 지극 정성으로 하여 법성신과 하나 되어 부처님이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에게는 축생 같은 어리석음이 모두 사라져 축생 같은 짓을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타(自他)의 치암(癡闇)]

 

육향육서(六向六誓)에서 세 가지 지옥과 아귀, 아수라, 축생 같은 악도(惡道)가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지독하게 악한 고통의 원인이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은 금생이나 전생에 지은 악한 업장 때문이다. 이러한 업장은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천수경을 독송하고 대비주를 염송함으로서 사라지게 하고 인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지혜를 발현하면, 그 지혜의 광명에 의해 지옥, 아귀, 아수라, 축생의 악도(惡道)가 즉시 소멸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액운이 닥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평소에 천수경과 대비주를 간단없이 염송하는 사람에게는 지혜로운 마음이 항상 샘솟아 어리석은 악도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는 불교적 수행의 효과를 설하고 있다.

 

 

라. 관세음보살 12가지 명호와 화신

 

부처님께서 이 우주 내에 생물과 생물 그리고 생물과 무생물들 사이가 하나로 어우러져 살아야 일체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진리로서 연기법을 설하셨으나 어리석은 사람가운데는 자기의 욕심을 체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연기법을 어겨가며 남을 불행하게 만들고 결국 자기도 불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불행을 막고 연기법에 수순하여 일체 중생이 편안한 극락세계를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보살상으로 특징을 지워 그 임무를 수행하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관세음보살님들의 특징을 닮아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르쳐주시는 보살상이다. 이들 중 12가지는 다음과 같다.

 

나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마하살

나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마하살

나무 천수보살(千手菩薩)마하살

나무 여의륜보살(如意輪菩薩)마하살

나무 대륜보살(大輪菩薩)마하살

나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마하살

나무 정취보살(正趣菩薩)마하살

나무 만월보살(滿月菩薩)마하살

나무 수월보살(水月菩薩)마하살

나무 군다리보살(軍茶利菩薩)마하살

나무 십일면보살(十一面菩薩)마하살

나무 제대보살(諸大菩薩)마하살

나무 본사아미타불(本師阿彌陀佛)

나무 본사아미타불(本師阿彌陀佛)

나무 본사아미타불(本師阿彌陀佛)

 

관세음보살님은 무량한 대비심을 베푸는 것을 원력으로 삼아 중생의 필요에 응하여 나투시는 모습이나 그 특징이 있어 이에 따라 12가지 이름이 천수경에는 등장하지만 마지막 12번째는 모든 대보살이라 하여 경전에 나오는 33분의 보살 중 앞 11분의 보살 이외의 모든 보살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낱낱의 보살 모두를 관세음보살이라 하여도 통함에 장애가 없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나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마하살

‘나무’는 ‘귀의합니다’인데 ‘귀의한다’는 말은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의지하고자 합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관세음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화신으로 부처님과 같은 위신력을 가지고 계신다. 인간 세상의 모든 중생들이 관세음보살님의 구원을 청할 때, 그 생각의 파장을 감지하여 분석하시고 방편을 선정하고 애원하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 그 소망을 이뤄주는 대보살님이다.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서약이다.

그런데 이 관세음보살님은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계시는 모든 중생들이 곧 관세음보살님이라고 알아야 한다. 가까이는 아내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남편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며, 부모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아들 딸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라는 것이다. 이들이야 말로 나의 괴로움을 씻어주고 웃음을 가져다 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서로서로 귀의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이 땅에서 극락국토를 이루게 될 것이다.

 

나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마하살

아미타부처님에게는 두 분의 좌우 협시 보살님이 계시는데 우보처가 대세지보살로 지혜와 용기문을 나타내고 좌보처 관세음보살은 자비문을 나타낸다. 대세지보살님의 지혜와 용기의 광명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삼악도를 여의고 위없는 용기를 얻게 함으로 지혜와 용기의 화신 대세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서약이다.

 

우리들 마음 가운데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함을 뜻한다. 매사에 연구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자신감이 넘친다. 자신감은 능력이 축적됨에 따라 쌓이고,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머뭇거리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지혜롭게 처리한다. 그래서 용기와 지혜는 항상 같이 가야 하는 것이다. 연구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매사를 처리함에 대세지보살님과 같이 지혜롭게 그리고 용감하게 사리를 판단하여 처리한다. 이러한 사람은 항상 남보다 앞서 가기에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나무 천수보살(千手菩薩)마하살

천수보살상에는 양쪽에 각각 20개의 손이 있다. 손바닥마다 눈이 있으며 한눈과 한손이 각각 25유(有)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천수천안(千手千眼)이 된다. 천수보살은 일체중생을 대자비심으로 그들을 그들의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포용하시어 고통에서 해탈케 하심으로 무한한 포용력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님이다. 중생의 소구소망을 빨리 성취케 해주시는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서약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부부(夫婦)는 포용력이 바다처럼 넓고 깊어 서로 다정한 사이를 항상 유지하며 상대를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긴다. 기도의 힘은 정말 묘한 것이다.

 

나무 여의륜보살(如意輪菩薩)마하살

‘여의(如意)’는 여의보주(如意寶珠), ‘륜(輪)’은 법륜의 준말이다. 부처님의 법을 통달하여 법을 뜻대로 이용할 수 있는 보살이라 중생이 원하는 것을 법에 의해 다 들어주시는 보살이다. 신(神)들이 불법을 배워 여의주를 얻으면 신통력이 자유로워 별나라를 평정하고 모든 마귀를 조복(調伏)받으며, 짐승이 불법을 배워 여의주를 얻으면 용이 되어 승천하고, 인간이 불법을 배워 여의주를 얻으면 소망을 이루고 복락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이미 이 여의주를 주어 보냈지만 인간이 어리석어 여의주의 용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시궁창에 묻어 버리기 때문에 그 여의주를 알아보는 법과 용법을 정확히 알려주시는 보살이다.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서약이다.

 

부인이 기도를 열심히 하면 식이 맑아져서 남편이 묻는 말에 바른 대답을 하게 된다. 남편이 부인 말대로 하면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니까 자연히 부인과의 대화가 잦아질 수밖에 없다. 기도를 하지 않는 부인은 식이 어둡다 보니 남편이 묻는 말에 엉뚱한 대답을 하기 쉽다. 부인 말 따라 하면 일을 망치는 수가 잦아지니 부인과의 대화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부인에게는 만사여의(萬事如意) 원만형통(圓滿亨通)하여 진다.

 

나무 대륜보살(大輪菩薩)마하살

불법(佛法)을 하늘과 땅에 전하고자 하는 대보살님이다. 이 보살은 불법에 통달하여 신통이 자재하여 항상 새로운 창조력을 발휘하여 하늘의 신(神)과 인간계에 이익 되는 일을 보여 줌으로서 세상을 불법(佛法)으로써 평정하는 위엄과 권능을 가지신 대보살님이다. 부처님께서 당시 인도의 사성계급(四姓階級)이 진리가 아닌 것을 설하시고 이를 파(破)해야 한다고 주장하시고 실현하려고 노력하신 것은 부처님의 위대한 창조력을 발휘하신 한 예이다. 이에 우리도 뛰어난 창의력과 창조정신을 부여받고자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서약이다.

 

불법에 의해 중생들에게 이로운 일을 함으로서 세상을 평정하고자 하는 원을 세우고 대륜보살님에게 귀의하는 기도를 지극하게 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창의력과 창조정신이 샘솟아 전륜성왕과 같이 세상을 평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무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마하살

관자재보살은 중생의 고통을 인식하심이 자재롭고 그 고통을 극복하게 해 주시는 자재로우신 보살님이다. 무지한 인간들을 일깨워 지혜의 등불을 밝혀 주시고, 몽매한 중생들을 가르쳐서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천차만별인 중생의 근기 따라 자유자재로 나투시어 그에 알맞게 처방을 내리시는 대보살님이시다.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서약이다.

관자재보살님께 귀의하여 가까운 사람의 고통을 바르고 신속하게 인식하고 그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관자재보살님을 향한 기도를 끊임없이 하라는 뜻이다.

 

나무 정취보살(正趣菩薩)마하살

정취보살은 예(藝)로서 성품을 삼아 별나라의 신(神)들이 모일 때마다 서로 흥겹도록 심오한 신비경(神秘境)을 펼치는 예술을 연출하여 영적인 풍요로움을 즐기게 하면서도 바른 길로 인도하여 근본 마음자리를 깨닫게 하는 대보살님이다.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서약이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여 별나라의 모든 신(神)들과 지상(地上)의 모든 중생들이 흥겨워하고 신비경(神秘境)에 들어가 영적인 풍요로움을 즐기게 하면서도 마음의 근본자리를 깨닫는 길로 인도하기 위해 관세음보살님을 향한 기도를 끊임없이 하라는 뜻이다.

 

나무 만월보살(滿月菩薩)마하살

초생달을 성인(聖人)의 계위가 시작되는 십지(十地) 중 초지(初地)로 보고, 만월은 성인의 계위의 마지막 단계인 십지(十地)로 본다. 그러므로 만월은 모든 업장을 소멸한 지혜의 완성단계를 상징하므로 무위사(無爲舍)에 해당하고 무위하면 지혜가 원만하여 만사길상(萬事吉祥)하고 여의원만(如意圓滿)하게 된다. 그리고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하니 자비심으로 충만하여 마치 보름달이 어두운 밤길을 밝혀주듯, 중생들의 고통을 녹여 내리는 보살로 지칭된다. 그러므로 만월보살은 수행자에게 지표가 되는 대보살님이다.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귀의하겠다는 서약이다.

 

수행자로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여 하루속히 초생달과 같은 초지(初地)의 수행계위에 오르고, 구경에는 만월(滿月)과 같은 십지품(十地品)에 올라 부처님이 머무시는 무위사(無爲舍)에 들어가 이 우주에 모든 어두운 곳을 밝혀 만사형통하게 하기 위해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대비주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뜻이다.

 

나무 수월보살(水月菩薩)마하살

달이 비친 바다 위에 한 잎의 연꽃을 타고, 왼손에 연꽃 봉오리를 들고 계신 모양을 하고 계신다. 물 속에 비친 달이 물을 가리지 않고 물을 따르듯이 중생의 종류나, 인종(人種), 그들의 믿음 등을 분별하지 않고 어느 사람의 말이라도 다 잘 들어주시어 그 사람을 편안하고 밝게 하여주심을 상징하는 대보살님이다.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그와 같이 하겠다는 서약이다.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여 상대를 지배하려는 생각이나 비위를 거스르게 하는 자세보다 상대의 뜻에 수순하여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자세를 취하도록 하기 위해 관세음보살님을 향한 기도를 지극하게 하라는 보살님이시다.

 

나무 군다리보살(軍茶利菩薩)마하살

군다리보살은 한 손에 대검(大劍)을 들고 다른 손엔 약병을 들고 계신다.

별나라마다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들을 무찌르고 불의(不義)를 물리치기 위해 도전해 가는 용기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만병통치약이 든 감로병으로 인간마다의 마음으로 스며드는 악마를 지켜 몸과 마음의 병을 깨끗이 고쳐주시는 대보살님이다.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그와 같이 하겠다는 서약이다.

 

사회의 질서를 혼란하게 하는 이들을 대치하고 불의(不義)를 조장하는 자들을 다스리기 위해 때로는 대검(大劍)으로 그들을 척결할 용기와 능력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대검보다는 약으로 오염된 그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고, 그들의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중생들의 아픔을 약으로 다스려 그들로 하여금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군다리보살님께 귀의하여 끊임없는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다.

 

나무 십일면보살(十一面菩薩)마하살

무수한 별나라의 모든 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표정과 성격에 따라 대응할 수 있도록 11개의 각각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 중 한 면(面)은 불면(佛面)이다. 억울함을 당하여 슬픈 이에게는 자애로운 모습, 도덕심이 없는 이에게는 화난 모습, 버릇없는 이에게는 위엄 있는 모습, 좋은 일을 하는 이에게는 미소 짓는 모습, 어려움이나 두려움에 빠진 이에게는 크게 웃는 모습 등 꾸중, 칭찬, 분노, 격려 등 중생 각각에게 맞는 얼굴로 응대하여 그들의 고뇌를 덜어 주시고 그들과 기쁨을 함께 하시는 가장 원만한 대보살님이다. 이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그와 같이 하겠다는 서약이다.

늘 화난 얼굴이나 굳은 모습 혹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 말고 상대의 사정에 따라 그에 맞게 얼굴 표정을 하라는 말씀이다.

 

나무 제대보살(諸大菩薩)마하살

이상 11분의 보살과 그 이외의 모든 대보살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그와 같이 하겠다는 서약이다. 기도는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고 그 원을 성취하고자 지극정성으로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는 것이다.

 

나무 본사아미타불(本師阿彌陀佛)

관세음보살님의 본사(本師)는 아미타불이라는 뜻이다. 즉 아미타부처님의 분신이 화현하여 여러 분의 관세음보살님으로 나투신다는 말이다.

아미타부처님은 모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시고자 대서원을 발하여 무량겁 동안 수행한 공덕으로 부처님이 되셔서, 좌보처 관세음보살과 우보처 대세지보살의 협시를 받으시고, 이 법계에 충만하여 모든 존재의 근본이시기에 온 법계에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스승이시다. 그리고 ‘나’의 영원한 생명인 무량수불(無量壽佛)이요, ‘나’의 영원한 빛인 무량광불(無量光佛)이시다. 그러기에 ‘나’의 임종시에 영접을 나오시는 부처님이시다. 이러한 부처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그와 같이 되도록 하겠다는 서약이다.

 

이 몸과 마음 다하여 부처님께 귀의하는 마음으로 용기와 지혜를 기르고, 자비심과 포용력을 기르며, 만사형통(萬事亨通)한 마음을 기르고, 자재로운 마음으로 정도(正道)따라 걷고, 깨끗한 마음 무위심(無爲心)으로 사회 정의(正義)를 실현하고, 불의(不義)를 척결함에 때로는 대검(大劍)을 때로는 약병을 사용하여 용감하고 지혜롭게 할 것이며, 불의(不義)로 인하여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의 몸과 마음의 병을 고쳐주고, 그리고 항상 수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서 남에게 이롭게 할 것을 다짐하는 보살님이 되고 부처님이 되도록 하겠다는 서약이다.

 

 

 

제3장 신묘장구대다라니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이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다 이사미 살발타 사다 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바바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계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마하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도로 미연제 마하미연제 다라다라 다린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마라 미마라 아마라 몰제예 혜혜로계 새바라 라아 미사미 나사야 나베 사미사미 나사야 모하자라 미사미 나사야 호로호로 마라호로 하례 바나마 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매다리야 이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 하라나야 마낙 사바하 싯다야 사바하 마하 싯다야 사바하 싯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이라간타야 사바하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상카 섭나녜 모다나야 사바하 마하라 구타다라야 사바하 바마사간타 이사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먀가라 잘마이바 사나야 사바하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 기제 새바라야 사바하』(3번)

 

불교의 모든 의식을 집행함에는 반드시 천수경을 독경함으로서 시작되는데 이 경의 핵심 가르침은 신묘장구대다라니라고 알려져 있다. 신묘장구대다라니나 진언은 밀교(密敎)에 해당하는데 밀교는 대승경전의 후기에 전승되었던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천수경 등 대승경전에는 거의 조금씩 밀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나 티벳불교에는 전적으로 밀교경전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밀교는 소리나 형태로 표현하는데 소리나 형태에서 그 뜻을 바로 알 수는 없으나 지극정성으로 외우거나 관하는 사람은 비밀스럽게 그 가피를 입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수경에 나오는 다라니나 진언은 ‘음성만다라’에 해당하고 여러 가지 모양을 한 관세음보살님의 형상이나 탱화 그림 만다라는 ‘형태만다라’에 해당한다. 어느 것이든 그 뜻을 쉽게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있다. 다만 음성만다라인 다라니나 진언을 자신과 일치하도록 지극 정성으로 염송함으로서 그 가피를 입게 되어있고 형태만다라도 지극정성으로 그를 관함으로서 가피를 입도록 짜여져 있다.

 

공부하는 사람이 현교(顯敎)를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이해하려고 함에 그 가르침이 담고 있는 신성한 뜻이 훼손되어 신비성이 사라지고, 또 분석적인 마음이 일으키는 산만한 마음은 마음의 집중을 오히려 장애하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현교가 주는 장애(障碍)를 봉(封)하고 오직 행할 뿐인 마음으로 문제의 핵심을 직관하는 힘을 길러주고 신비한 가피를 은밀하게 입게 하여 주기 위해 설한 교설이 밀교(密敎)이다. 본래 비밀한 가르침이니 뜻을 파헤치려 하지 말고 오직 외움에 의해 자신과 일치되었을 때 그 주문의 가피를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받는다고 하는 신비성을 고취하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교(顯敎)인 대승경전에 밀교적 요소가 적당히 가미되어 현교가 주는 결점을 보완하여 신비성을 돋우고 있다. 반야심경, 법화경, 화엄경 등이 모두 대승경전인 현교이지만 신비성을 훼손하는 이와 같은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밀교인 다라니나 주문을 적당히 가미하여 현교적이라 뜻을 이해시켜 주면서도 밀교적인 맛이 있어 그 경전의 신비성과 신성함을 유지해 주고 있다. 단 천수경은 밀교에 현교를 가미한 특징이 있다.

 

밀교의 본래 취지가 이와 같음으로 다라니의 뜻을 해부하여 알고자 하는 것은 중생의 호기심에 의한 것이지 부처님의 본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본래의 뜻은 다라니나 진언은 무조건 외워 자신과 일치하게 하고 ‘형태만다라’도 분석적인 생각을 접어두고 무조건 지극정성으로 관함으로서 그 가피를 은밀하게 입게 한 것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인도 산스크리트 원문이 중국글로 번역되었던 한문을 중국 발음으로 한글 음역을 하지 않고 한문을 우리말로 음역하였고 또 띄어쓰기가 바로 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종단적인 차원에서 취급할 문제이므로 우리는 종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대로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니 이의 제기를 하지 말고 사정에 순응하는 것이 본인들의 수행에 이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뜻을 알고자 하는 이가 많으니 참고로 내용을 분석하여 보도록 하겠다.

 

나모 라다나 다라야야

나모 ; 나무, 귀의하여 받든다 / 라다나 ; 보배 / 다라야 ; 삼(3) / 야 ; 에게 이를 모두 합치면,

‘삼보님께 귀의하여 받들겠습니다.’ 가 된다.

 

나막 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 가로니가야

나막 ; 나무, 귀의하여 받든다 / 알약 ; 성(聖)스럽다 / 바로기제 새바라야 ; 관자재에게 / 모지 ; 보리 / 사다바야 ; 살타에게 / 마하 ; 크다, 대(大) / 사다바야 ; 보살에게 / 마하 ; 크다, 대(大) / 가로니가야(까로니까야) ; 비(悲)존에게 /

이를 모두 합치면,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님께 보리살타에게 대보살에게 대비하신 임에게 귀의하여 받들겠습니다.’ 가 된다.

 

여기까지는 삼보님에게 귀의하는 말씀으로 다라니를 시작하는 서론으로 삼고 있다.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다사명 나막까리 다바 이맘알야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옴 ; 모든 진언과 다라니와 주문의 모체가 되는 것이며, 모든 소리의 어머니이다. 또한〈옴〉은 우주의 핵심이며 지극한 찬탄의 소리이며, 상대를 섭복(攝伏) 받는 힘이 있는 것이다 / 살바 ; 일체 / 바예수 ; 두려움 / 다라나 ; 구제, 구도 / 가라야 ; 행한다 / 다사명 ; 그런 까닭에 / 나막까리 다바(나막 까리다바) ; 어지신 분께 귀의하여 받든다 / 이맘 ; 이로 말미암아 / 알야(알약) ; 성스럽다 / 바로기제 새바라 ; 관자재보살 / 다바 ; 위신력 /

이들을 모두 합치면,

‘옴, 일체의 두려움에서 구제해 주시는 저 어지신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예경하면 이로 말미암아 성스러운 관자재보살의 위신력이 출현한다.’ 가 된다.

 

니라간타 나막하리나야 마발타 이사미 살발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니라간타 ; 청(靑) 경(頸)이란 관세음보살이 과거 독(毒)용(龍)과 싸운 행적을 나타냄 / 나막 ; 명성이 높은 / 하리나야 ; 마음, 심수(心髓) / 마발다 ; 회귀(回歸), 회(回)경(京), 돌아온다 / 이사미 ; 나를, 나에게 / 살발타 ; 일체의 목적, 이익 / 사다남 ; 완성, 성취 / 수반 ; 길상(吉祥), 훌륭한 / 아예염 ; 불가(不可)승(勝), 이길 수 없는 / 살바 ; 일체 / 보다남 ; 귀신, 정영(精靈) /

이를 모두 합치면,

‘청경(靑頸)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명성이 높은 마음의 주문(呪文)에 회귀하옵니다. 일체의 목적과 일체의 이익을 성취하시고 길상을 이루시기 때문에 일체의 모든 정영(精靈) 귀신들이 이길 수 없는 분이시여.’ 가 된다.

 

바바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게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바바말아 ; 탄생하다, 존재하다, 있다, 삶의 길 / 미수다감 ; 정화(淨化), 청정(淸淨) / 다냐타 ; 이와 같이 / 옴 ; 극찬의 의미를 지닌 진언의 근본되는 소리 / 아로게 아로가 ; 광명, 명조(明照), 안목(眼目), 주시(注視), 봄 / 마지 ; 숭배, 공경, 찬탄 / 로가(로까) ; 세간, 세계 / 지가란제 ; 초월하다 / 혜혜 ; 오! / 하례 ; 실어나르는 신(神)의 이름, 실어나른다 /

이를 모두 합치면,

‘모든 삶의 길에서 우리를 청정케 하옵시는 분이시여. 이른 바, 옴! 광명존이시여, 광명의 지혜존이시여, 세간을 초월하신 존(尊)이시여. 오, 오, 관세음이시여, 우리를 피안으로 실어 나르시옵소서.’ 가 된다.

 

마하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도로 미연제

마하 ; 대(大) / 모지 사다바 ; 보리살타, 보살 / 사마라 사마라 ; 기억하다 억념(憶念)하다 / 하리나야 ; 마음의 진언, 심수(心髓) / 구로구로 ; 작위(作爲), 시행, 행위 / 갈마(카르마) ; 업(業), 작용, 작업, 행업, 작법, 행위 / 사다야 사다야 ; 성취한다, 성취한다 / 도로도로 ; 호지(護持) 호지, 보호해 가지다, 보호해 가지다 / 미연제 ; 승리하다, 조복받다, 아무도 이길 수 없다 /

이를 모두 합치면,

‘위대하신 보살이시여, 우리가 외우는 진언을 기억하옵소서, 억념하옵소서, 작업을 시행하옵소서, 실행하옵소서, 성취케 하옵소서 성취케 하옵소서, 우리를 보호하고 굳게 지켜 주옵소서, 우리를 보호하고 굳게 지켜 주옵소서, 승리자시여, 승리자시여.’가 된다.

 

마하 미연제 다라다라 다린 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마라미마라 아마라 몰제 예혜혜

마하 미연제 ; 위대하신 승리자, 대 승리자 / 다라다라 ; 수지(受持), 보존, 임지(任持) / 다린(다라) ; 받아서 지니다 / 나례 ; 대지(大地)의 왕 / 다린 나례 ; 보호해 주시는 대지의 왕이시여 / 새바라 ; 자재(自在) / 자라자라 ; 발동(發動), 행동 / 마라 ; 진구(塵垢), 때, 더러움, 오염 / 미 ; 부정을 나타내는 부정사(不定詞) / 미마라 ; 더러움을 벗어난, 때를 없앤 / 아 ;〈미〉와 같이 부정을 나타내는 부정사(不定詞) / 아마라 ; 미마라와 같이 더러움을 벗어난, 때를 없앤 / 몰제 ; 훌륭한 모습, 아름다운 모습 / 예혜혜(예히예히) ; 강림하다, 오다 /

이를 모두 합치면,

‘위대하신 승리자시여, 보호해 주옵소서, 보호해 주옵소서, 보호해 주시는 대지(大地)의 주인이시여, 자재존이시여, 발동하옵소서, 발동하옵소서, 우리들의 불행을 초탈한 분이시여, 진구(塵垢)가 다 떠나신 분이시여, 청정 원만한 분이시여, 우리에게로 오십시오, 오십시오.’ 가 된다.

 

로계 새바라 라아미사미 나사야 나베 사미사미 나사야 모하자라 미사미 나사야 호로호로

로계 ; 세간(世間), 세계 / 새바라 ; 주인 / 라아 ; 탐심 / 미사 ;독(毒) / 미나사야 ; 멸망(滅亡), 소멸(消滅) / 나베사 ; 진심(瞋心), 성내는 마음 / 미사 ; 독(毒) / 미나사야 ; 멸망, 소멸 / 모하 ; 우심(愚心), 어리석은 마음 / 자라 ; 동요(動搖) / 모하자라 ; 어리석음에 의한 행동 / 미사 ; 독(毒) / 미나사야 ; 멸망, 소멸 / 호로호로 ; 취(取)해 가지다, 뿌리 채 가져가다 /

이를 모두 합치면,

‘세간의 주인이신 자재존이시여, 탐심의 독을 소멸케 하옵소서, 진심의 독을 소멸케 하옵소서, 어리석음의 독을 소멸케 하옵소서, 어서 빨리 가져가십시오, 취(取)해 가십시오.’ 가 된다.

 

마라호로 하례 바나마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모다야 모다야

마라 ; 더러움 / 호로 ; 거두어가다 / 마라호로 ; 진구(塵垢) 때를 취거(取去)하옵소서 / 하례 ; 운반하는 신(神)의 이름, 운재(運載), 실어 나르다 / 바나마(파드마, 반메, 빠드마) ; 연꽃 / 나바 ; 마음, 중심, 배꼽, 중앙 / 사라사라 ; 물의 흐르는 모습을 나타낸 의성어로서 여기서는 감로(甘露)법수(法水)의 흐름 / 시리시리 ; 물의 흐르는 모습을 나타낸 의성어로서 여기서는 감로의 지혜 광명을 유출함 / 못쟈못쟈 ; 붓다, 못다, 불타, 깨달음, 도(道), 깨치옵소서, 깨치옵소서 / 모다야 모다야(보다야) ; 보리(菩提), 깨닫게 하옵소서, 깨닫게 하옵소서 /

이를 모두 합치면,

‘진구(塵垢) 때를 취거(取去)하옵소서. 마음의 중심에서 연꽃을 피우시는 분이시여, 감로(甘露)법수(法水)를 유출하옵소서, 유출하옵소서, 감로의 지혜 광명을 유출하옵소서, 유출하옵소서, 깨치게 하옵소서, 깨치게 하옵소서, 깨닫게 하옵소서, 깨닫게 하옵소서.’ 가 된다.

 

여기까지는 관세음보살님의 위신력을 여러 가지 의미로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서원을 성취케 하려는 데 그 뜻이 있다.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하라나야 마낙 사바하

매다리야(마이트리야) ; 미륵보살, 자비스러운, 인정이 깊은 / 니라간타 ; 청경(靑頸)관음 / 가마사 ; 욕망, 원망(願望) / 날사남 ; 바라본다 / 바라하라나야 ; 기쁨, 환희 / 마낙 ; 공경 / 사바하 ; 성취, 원만, 구경, 완성 등의 뜻이 담긴 종결어미(終結語尾) /

관세음보살의 첫 번째 이름: 자비심이 깊으신 청경(靑頸) 관음존이시여, 희망의 성취를 바라는 자에게 환희심과 공경심을 내게 하는 분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싯다야 사바하

싯다야 ; 성취 /

관세음보살의 두 번째 이름: 성취존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마하싯다야 사바하

관세음보살의 세 번째 이름: 위대하신 성취존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싯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싯다 ; 성취 / 유예 ; 요가, 능소(能所)가 없게 하다, 나와 세계가 하나로 된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다 / 새바라야 ; 자재(自在) /

관세음보살의 네 번째 이름: 요가를 성취하신 자재존(自在尊)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니라간타야 사바하

니라간타 ; 청경(靑頸)관음 /

관세음보살의 다섯 번째 이름: 청경관음존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라하 ; 산돼지 / 목카 ; 얼굴 / 싱하 ; 사자 /

관세음보살의 여섯 번째 이름: 산돼지 얼굴, 사자 얼굴을 한 관세음보살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바나마 ; 연꽃 / 하따야 ; 잡다, 손으로 잡다 /

관세음보살의 일곱 번째 이름: 연꽃을 손에 잡으신 관음존이시여, 축복하여 주소서.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자가라 ; 큰 둥근 바퀴 / 욕다야 ; 전투, 전쟁 /

관세음보살의 여덟 번째 이름: 큰 바퀴를 굴리며 전투하는 관음존이시여, 승리하게 하소서.

 

상카섭나녜 모다나야 사바하

상카섭나네 ; 법(法) 소라 나팔 소리 / 모다나야 ; 깨닫게 하는.

관세음보살의 아홉 번째 이름: 법(法)소라 나팔 소리로써 어두움을 헤매는 자를 깨닫게 하시는 관세음보살이시여, 축복하여 주소서.

 

마하라 구타다라야 사바하

마하 ; 크다 / 라구타 ; 곤봉, 막대 / 다라야 ; 가지다 /

관세음보살의 열 번째 이름: 큰 곤봉을 가지고 불의에 임하시는 관음존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바마사 간타니사 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바마 ; 왼쪽 / 사간타 ; 어깨 / 이사 ; 모가 나다 / 시체다 ; 굳게 지키다 / 가릿나 ; 흑색(黑色) 신(神) / 이나야 ; 승리자(勝利者) /

관세음보살의 열한 번째 이름: 왼쪽 어깨의 모서리를 굳게 지키는 승리자이신 흑색의 신이신 관음존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먀가라잘마 이바사나야 사바하

먀가라 ; 호랑이 / 잘마 ; 가죽 / 이바사나야 ; 옷을 입다 /

관세음보살의 열두 번째 이름: 호랑이 가죽옷을 입은 관음존이시여, 나의 소원을 성취하게 하소서.

 

이상의 열두 가지 관세음보살님은 자비로운 감로수로서 중생을 제도하시기도 하고, 중생을 호랑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호랑이와 맞서기도 하고 그들을 제도하기도 하며, 무기를 가지고 불의(不義)와 전투하여 중생을 구제하기도 하고, 중생에게 이익 되는 일을 하여 부정이 저절로 소멸되게 하기도 한다. 관세음보살님은 한없는 자비심을 베풀기 위해 제도할 중생의 근기 따라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제도하기도 하고, 중생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에 알맞은 모습으로 가해자(加害者)를 제도하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함을 알 수 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3번)

이 부분은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맨 처음에 나왔던 구절인데 맨 마지막에도 다시 되풀이하여 종결구로 삼고 있다. 그 뜻은

삼보님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님에게 귀의합니다.이다. 이것은 삼보님과 관세음보살님에 대한 끝없는 예배와 존경심의 표현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불교를 신앙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이 대비주(大悲呪)를 지극정성으로 외우면 위와 같이 대비주의 위신력의 가피를 입는다는 말씀이나 주문을 외우기만 하고 아무런 행을 하지 않아도 주문의 가피를 입는다고 생각하기보다 주문을 외우며 관세음보살님을 닮고자 행을 하라는 뜻으로 해석함이 옳다고 본다. 예를 들면 산돼지가 자주 와서 위험한 일이 생기면 산돼지가 오지 않도록 이 주문을 외울 뿐만 하니라 산돼지를 죽이려 하거나 계속 피해가 일어나는 것을 두고 있지 말고 관세음보살님과 같이 피해를 방지하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뜻이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산돼지가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해 산돼지 얼굴을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셨다.

 

신묘장구대다라니(범어를 한글로 음역)

 

나모 라다나 다라야야 나막 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 까로 니까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까리다바 이맘 알약 바로기제 새바라 다바 니라간타 나막 하리나야 마발타 이사미 살발타 사다남 수반 아예염 살바 보다남 바바말아 미수다감 다냐타 옴 아로게 아로가 마지로가 지가란제 혜혜하례. 마하 모지 사다바 사마라 사마라 하리나야 구로구로 갈마 사다야 사다야 도로도로 미연제 마하 미연제 다라다라 다린 나례 새바라 자라자라 마라미마라 아마라 몰제 예혜혜. 로계 새바라 라아 미사 미나사야 나베사 미사 미나사야 모하 자라 미사 미나사야 호로호로. 마라 호로 하례 바나마 나바 사라사라 시리시리 소로소로 못쟈못쟈 보다야 보다야. 마이트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하라나야 마낙 사바하. 싯다야 사바하. 마하 싯다야 사바하. 싯다 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니라간타야 사바하. 바라하 목카 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상카섭나녜 모다나야 사바하. 마하 라구타 다라야 사바하. 바마 사간타 이사 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먀가라 잘마 이바사나야 사바하

나모 라다나 다라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3번)

 

신묘장구대다라니(범어를 뜻 번역)

마하 가로니까야 흐리다야 다라니[대비심(大悲心) 다라니]

 

삼보에게 귀의하여 받들겠습니다.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님에께 보리살타에게 대보살님에게 대비하신 님에게 귀의하여 받들겠습니다.

일체의 두려움에서 구제해 주시는 저 어진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예경하면 이로 말미암아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님의 위신력이 출현하십니다. 청경(靑頸) 관세음보살이신 명성이 높은 마음의 주(呪)에 회귀하옵니다. 일체의 목적, 일체의 이익을 성취하시고, 길상으로서 일체의 모든 정영(精靈) 귀신들이 이길 수 없는 분이시여. 모든 삶의 길에서 우리를 청정케 하옵시는 분이시여. 이와 같이 옴! 광명존이시여, 광명의 지혜존이시여, 세간을 초월하신 존(尊)이시여. 오!, 오!, 관세음이시여, 우리를 피안으로 실어 나르시옵소서. 위대하신 보살이시여, 우리가 외우는 진언을 기억하옵소서, 억념하옵소서, 작업을 시행하옵소서, 실행하옵소서, 성취케 하옵소서, 성취케 하옵소서, 우리를 보호하고 굳게 지켜 주옵소서, 우리를 보호하고 굳게 지켜 주옵소서, 승리자시여, 승리자시여. 위대하신 승리자시여, 수지 보존하옵소서, 보호해 주옵소서, 보호해 주시는 대지(大地)의 왕이신 자재존이시여, 자재존이시여, 발동하옵소서, 발동하옵소서, 우리들의 불행을 초탈한 분이시여, 무구청정(無垢淸淨)하고 원만한 분이시여, 강림(降臨) 하옵소서, 우리에게로 오십시오. 세간의 주인이신 자재존이시여, 탐심의 독을 소멸케 하옵소서, 진심의 독을 소멸케 하옵소서, 어리석음의 독을 소멸케 하옵소서, 어서 빨리 가져가십시오, 뿌리째 가져가십시오. 진구(塵垢) 때를 취거(取去)하옵소서. 연꽃의 마음을 간직한 관세음보살님이시여, 감로법수(甘露法水)를 유출하옵소서, 유출하옵소서, 감로의 지혜 광명을 유출하옵소서, 유출하옵소서, 감로의 덕(德)을 유출하옵소서 유출하옵소서. 깨치게 하옵소서, 깨치게 하옵소서, 깨닫게 하옵소서, 깨닫게 하옵소서.

자비심이 깊으신 청경(靑頸) 관음존이시여, 희망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자에게 환희 공경심을 내게 하는 분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성취하신 분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위대하신 성취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요가를 성취하신 자재존(自在尊)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청경관음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산돼지 얼굴, 사자 얼굴을 한 관세음보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연꽃을 손에 잡으신 관음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큰 바퀴를 굴리며 전투하는 관음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법(法)소리 나팔 소리로써 깨닫게 하시는 관세음보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큰 곤봉을 가진 관음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왼쪽 어깨의 모서리를 굳게 지키는 흑색의 승리자이신 관음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호랑이 가죽옷을 입은 관음존이시여, 성취하게 하소서.

삼보님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성스러운 관자재보살님에게 귀의합니다.(3번)

 

우리나라의 독송본 천수경은 당나라 때, 가범달마(伽梵達磨 Bhagavad -dharma)가 한역(漢譯)한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광대원만무애대비심(廣大圓滿無碍大悲心) 다라니경(陀羅尼經)이다.

숭산행원 큰스님을 비롯하여, 일제(日帝) 전후에 거승(巨僧)이였던 용성선사(龍城禪師) 외 다수의 선사들이 다라니 수행을 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만속장경(卍續藏經) 권129, 청나라 때 독체(讀體)가 편찬한 사명지례시집(四明知禮始集)에 의하면, 중국의 천태지의(天台智顗)선사, 중봉명본(中峰明本)선사, 건안자여(建安自如)선사, 정자덕해(淨慈德海), 연화원 의윤(義潤)선사, 경산희릉(徑山希陵)선사 등 많은 선사들이 선(禪)에 종지를 두고 있으면서 다라니 수행을 극찬한 게송을 남기고 있다. 더욱이 중봉명본(中峰明本, 1263-1323)은 원나라 때 스님으로서 중국 임제의 정맥조사인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제자이다. 사명지례(四明知禮)선사는 천수안대비심(千手眼大悲心)다라니 수행법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사명지례(四明知禮)선사는 천태종 17조의 조사이며, 고려 보운의통(寶雲義通 천태 16조)존자의 제자로서 혜사, 천태, 관정, 형계를 이은 천태종 대저작가의 한 분이다. 고명(高名)한 역대 선객들이 선(禪)과 천수다라니를 겸수(兼修)한 사실은 수행자가 알고 참고해야 할 사실이다. 고명(高名)한 상근기(上根機) 선객들도 선(禪)과 천수다라니를 겸행(兼行)하였으니, 수행 초보자와 하근기(下根機) 중생들은 이 점을 유념(留念)함으로써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비주의 영험에 관하여 우리말 천수경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원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관세음보살은 부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대비신주를 외우고서도 세 가지 나쁜 곳(三惡道)에 떨어진다면 저는 서원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대비신주를 외우고서도 모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저는 서원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대비신주를 외우고서도 한량없는 삼매와 변재를 얻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저는 서원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대비신주를 외우고서도 현재의 삶 가운데서 모든 구하는 바를 만약 이루지 못한 자가 있다면 대비심다라니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서, 모인 대중 앞에서 손을 모으고 바르게 머무시어 모든 대중들에게 크나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시고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으시며, 곧 이같이 넓고 크고 원만하여 걸림 없는 대비심다라니를 설하시었다. …………. 이 대비심다라니를 들은 대중 가운데 어떤 이는 수다원과를 얻고, 어떤 이는 사다함과를 얻으며, 어떤 이는 아나함과를 얻고, 어떤 이는 아라한과를 얻었으며, 또 어떤 이는 일지(一地)를 얻거나, 이지(二地), 삼지(三地), 사지(四地), 오지(五地), 나아가서는 십지(十地)를 얻어서, 셀 수 없는 많은 중생들이 깨달음의 보리심(菩提心)을 내었다라고 설하고 있다.

 

대장경에 있는 다라니 외우는 공덕을 요약하면: 이 다라니는 과거 99억 갠지스 강의 모래 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①육바라밀의 실천이 완전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빨리 완전하게 하고, ②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내지 못한 자로 하여금 빨리 바른 깨달음의 마음을 내게 한다. ③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는 불망염지(不忘念智)를 얻게 하고, ④병을 일으키는 요인들을 제거하여 끝내 병 없는 건강을 회복하게 한다. ⑤성문(聲聞)의 사람으로서 아직 해탈의 성과를 얻지 못한 자로 하여금 빨리 해탈의 성과를 얻게 하고, ⑥아직 대승(大乘)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중생들로 하여금 대승의 씨앗과 진리의 싹이 자라나게 한다. ⑦대비주의 방편과 자비의 힘에 의하여 필요로 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되고, ⑧삼악도를 벗어나고 고통을 여의게 된다. ⑨바른 깨달음의 길인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의 지위에 빨리 오르도록 하고, 나아가서는 불지(佛地)에 까지 이르도록 하여 다라니 수행자는 자연히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이루게 된다.

 

 

 

제4장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소덕

 

대다라니를 수지(受持), 독송(讀誦), 사경(寫經)하는 공덕을 다음 6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 사방찬(四方讚)

- 도량찬(道場讚)

- 참회게(懺悔偈)

- 참제업장(讖除業障) 십이존불(十二尊佛)

- 십악참회(十惡懺悔)

- 참회진언(懺悔眞言)

 

 

가. 사방찬(四方讚)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사방찬(四方讚)이란 동남서북의 네 방향을 찬탄하는 것이다. 즉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일념으로 독경, 서사(書寫) 함으로서 관세음보살의 위력이 우주에 두루 충만하여 진다. 관세음보살의 위력이 우주에 충만하므로 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가 얻어진다는 뜻이다.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

첫째, 동쪽을 향해 물을 뿌리면, 도량이 청결(맑음)해지고,

동쪽 해가 밝아올 때 대비주를 외우면 마음이 맑아지고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둘째, 남쪽을 향해 물을 뿌리면, 청량(시원)함을 얻고,

한 낮에 대비주를 외우면 마음이 시원해지고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셋째, 서방을 향해 물을 뿌리면, 정토를 갖추며,

해가 지는 것을 보고 대비주를 외우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넷째, 북방을 향해 물을 뿌리면, 편안하고 건강함이 영원하다.

잠자기 전에 대비주를 외우면 밤새도록 편안하고 건강하게 잠을 이룬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일념으로 송경(誦經)하거나 사경한다고 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기에 도량 즉 마음이 청결해져서 영원히 편안하고 온화하여질 수 있을까?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송경하거나 사경할 때, 송경을 방해하는 번뇌가 생긴다. 입으로는 <다라니>를 외우고 있지만 생각은 딴전을 피우고 있는 것도 일종의 번뇌이다. 이러한 잡념에 잠겨있는 번뇌에서 깨어나게 하는 선호신(善護神)이 대자대비하신 <다라니>의 관세음보살이다. <다라니>의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의 위력은 방해하는 번뇌를 그대로 두고 오로지 일념으로 <다라니>를 놓치지 않고 전념으로 지송(持誦)하게 한다. 이와 같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가운데 대비주(大悲呪)의 위력이 마음속에 있는 모든 번뇌를 소제하고 자신의 마음 안에서 대비심이 강화된다. 대비주(大悲呪)의 위력이 강화되어 나아가는 가운데 대비주(大悲呪)를 설하신 부처님의 마음과 송경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도 하나가 되어 버린 줄 모르는 어떤 경지(境地)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같은 것을 끊임없이 전념(專念)으로 반복하는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극치이다. 정신 통일(統一)의 경지를 넘어 삼매로 몰입하는 현상이다.

 

이것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에 머문다고 한다. 부처님의 마음은 일체 번뇌가 없어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고 텅 비어있는 태허와 같은 마음이면서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므로 부처님의 마음자리에 머무는 우리들의 마음도 조금도 번뇌와 같은 걸림이 없는 태허한 마음이요, 대자대비한 마음이요, 모든 고통 받는 중생, 모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중생, 모든 병으로 고통 받는 중생과 하나 되어 구제할 수 있는 지혜와 방편을 갖춘 성인(聖人)이 된다. 이러한 성인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청결하여졌으므로 너와 나,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능소(能所)가 없어져,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시원하여 청량함을 얻는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시원함을 얻음으로써 가정의 일들을 시원하게 풀어 갈 수 있고, 이웃과 사회 문제 해결이 시원해지고, 모든 인간관계가 시원해진다.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청량하므로 이러한 성인은 머무는 곳이 바로 정토(淨土)가 되는 것이다. 정토를 구족하였음으로 영원히 편안하고 온화한 생활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자기 자신이 편안함을 가질 때, 가족이 편안해지고, 더 나아가 이웃과 사회, 온 인류가 편안함을 얻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면,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

일쇄(一灑)의 일(一)은 첫 번째라는 의미이고 쇄(灑)는 뿌린다, 씻는다는 뜻이니 대비주를 외워 마음의 때를 씻어낸다는 말이다. 마음의 때란 번뇌 망상을 의미하고, 동방(東方)은 해가 뜨는 동녘을 의미함으로 시간적으로 보면 새벽을 뜻하고, 결도량(潔道場)의 도량(道場)은 절(寺), 집, 직장 등 수행처를 의미하나 여기서는 내 마음을 수행처로 본다. 결도량(潔道場)은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말이다. 즉 새벽 일찍 일어나 대비주를 외워 번뇌를 씻어내면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뜻이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이다.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이쇄(二灑)의 이(二)는 하루 일과 중 두 번째라는 뜻이고, 쇄(灑)는 위와 같고, 남방(南方)은 남쪽이니 시간적으로 정오(正午)이다. 득청량(得淸涼)의 득(得)은 얻는다이고 청량(淸涼)은 맑고 서늘하다, 시원하다이다. 새벽에 대비주를 외우고 하루 일과를 시작해서 정오(正午) 경에 덥고 힘들고 피곤할 때 대비주를 외우면 피곤이 풀리는 것이 마치 더운 여름에 샤워 듯이 시원해진다는 뜻이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이다.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삼(三)은 하루 일과 중 세 번째라는 뜻이고, 서방(西方)은 해지는 곳을 의미함으로 저녁 때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때를 의미하고, 구정토(俱淨土)의 구(俱)는 갖춘다는 말이고, 정토(淨土)의 정(淨)은 깨끗한 것이니 근심 걱정이 없어 맑고 깨끗한 것이며, 토(土)는 흙 혹은 땅이니 여기에서는 마음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날의 일이 모두 원만히 진행되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대비주를 외우면 하루의 피곤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회복된다는 뜻이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이다.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사(四)는 하루 일과 중 네 번째라는 뜻이고, 북방(北方)은 시간적으로 어두운 밤을 의미하니 잠잘 때이다. 영안강(永安康)의 영(永)은 오랫동안, 안강(安康)은 편안하고 건강한 것이니, 잠자리에 들기 전에 대비주를 외우고 자면 밤새도록 편안하고 건강하게 잠을 잘 잔다는 뜻이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이다.

 

동남서북(東南西北)을 하루 시간에 비유하여 설명하였지만 사계절(四季節)에 비유하여도 같은 해석이 나온다. 동(東)은 봄, 남(南)은 여름, 서(西)는 가을, 북(北)은 겨울에 비유된다. 매일 새벽, 점심, 저녁, 잠잘 때 네 차례 씩 대비주를 열심히 외우며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도 대비주를 열심이 외우며 밭을 매며, 가을에도 대비주를 열심히 외우며 추수하여 일년 농사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겨울에 대비주를 외우며 편안하고 온화하게 쉰다는 뜻도 된다.

 

또 동남서북(東南西北)을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볼 수도 있다. 유년기에 매일 새벽, 점심, 저녁, 잠잘 때 네 차례 씩 대비주를 외우며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청년기에도 대비주를 외우며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며, 장년기에도 대비주를 외우며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하고, 노년기에도 대비주를 외우며 열심히 자기 할 일을 하면 그 때, 그 때 해야 할 일들을 원만히 성취하여 만사형통하고 편안히 일생을 마감할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동서남북이라하지 아니하고 동남서북이라고 부르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유교나 다른 종교에서 만물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동서남북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만 불교에서 사물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지 아니하고 진리에 순응하는 안목으로 보기 때문에 동남서북이 되는 것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 남쪽 서쪽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이므로 그 순서를 따르고 있다. 이는 일체가 이와 같이 하나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상대적인 개념과 정반대의 의미가 있다.

 

 

나. 도량찬(道場讚)

 

도량찬(道場讚)이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번뇌가 없는 마음을 찬탄한다는 뜻이다.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의 도량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이고, 청정(淸淨)의 청은 맑은 것, 사념(邪念)이 없는 것이고, 정은 깨끗한 것이니 맑고 깨끗한 것이다. 무하예(無瑕穢)의 무는 없는 것이고, 하(瑕)는 옥의 티나 허물이며 예(穢)는 더러운 것이니 허물이나 더러움이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대비주(大悲呪)로 수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맑고 깨끗하여 티가 없고 허물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다가 된다.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의 삼보(三寶)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이고 천룡(天龍)은 천룡팔부 신장님으로 우리들의 신앙의 대상으로써 우리들을 악귀(惡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소원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불가사의한 위신력을 갖고 계신 신(神)이다. 이러한 선신(善神)들이 대비주를 항상 외우며 수행하는 사람의 청정한 마음자리에 내려오셔서 머무신다는 뜻이다.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의 아금(我今)은 지금 내가이고, 지송(持誦)의 지(持)는 가지다 유지하다이고, 송(誦)은 외우다 암송하다이니 계속 끊임 없이 암송하다이다. 묘진언(妙眞言)은 묘한 진언이니 대비주(大悲呪)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내가 지금 끊임없이 대비주를 암송하고 있사오니’가 된다.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의 원사(願賜)는 내려주시기를 원한다이고, 자비(慈悲)는 관세음보살님의 대자대비하신 위신력이며, 밀가호(密加護)는 은밀한 가피로 보호한다는 뜻이니, ‘원하옵건데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의 은밀하신 가피로 저를 보호하여 주소서’가 된다.

 

대비주(大悲呪)를 지송해 마음이 티 없이 맑아진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 모든 중생이 다 부처로 보이게 되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는 의미이다. 내 아내 부처님, 내 남편 부처님, 내 시아버지 부처님, 시어머니 부처님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생각하고 대하게만 되면 좋고 편안하고 훌륭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마음은 몸에도 늘 좋고 건강한 기운(氣運)을 흐르게 하여 정상적이고 건강한 세포가 생성된다. 건강하고 좋은 세포는 좋은 파장을 내 보내 건강한 정신을 만든다. 그러므로 좋은 세포는 좋은 생각을 만들어내는 그릇이다. 좋은 세포는 좋은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생산하여 남보다 앞선 생각을 항상 유지하게 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는 비결을 가진다고 하고, 여기에서는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라고 했다.

반대로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기도도 되지 않을 뿐더러 나쁜 기운을 만들어 나쁜 세포를 만들고 나쁜 세포는 나쁜 생각을 방출하여 주변을 어지럽게 하고 삼보와 천룡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대비신주를 외워 마음이 티 없이 맑아진 사람의 마음에는 모든 업장이 녹아내려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어 마음이 허공처럼 가없는 마음이 되어 삼보와 모든 천룡 신장님들이 머무는 곳이 됨으로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라고 한다.

 

항상 이 대비신주를 외우고 있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이라 했고, 우선 내 몸과 마음, 가정과 사회, 인류와 중생을 위해 자비하신 관세음보살님께서 은밀하게 저의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라는 서원으로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라고 했다.

 

 

다. 참회게(懺悔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주기적으로 계속 반복하여 지송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복잡했던 마음이 순화(純化) 되어간다. 그러면서 자기의 잘못을 알게 되고, 뉘우치게 되며,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나게 되어 저절로 참회를 하게 된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

 

위에서 모든 번뇌를 없앤다고 하였는데 그 방법은 바로 참회이다. 참회는 언제나 먼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상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진정한 참회가 될 수 없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 인정하고, 잘못한 말과 행동을 후회하고, 마음속으로 그 잘못한 이치를 깨달아, 간절하게 참회하는 것을 이참(理懺)이라고 한다. 절실하고 간절한 이참(理懺)이 없이는 숙세에 지은 업(業)의 습(習)을 소멸하기 어려운 것이다.

 

담배를 피우는 습이나, 노름을 하는 습이나, 술을 마시는 습에 대해 비록 자기가 잘못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끊기가 어렵다. 이것은 자기의 잘못에 대해 간절하고 절실한 이참(理懺)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절하고 절실한 이참(理懺)과 더불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청소 간병 등의 노동 봉사, 혹은 5백배 절을 한다든지, 남을 즐겁게 하는 말을 하고 이롭게 하는 일을 한다든지, 재물 보시 행, 독경 혹은 사경 등을 하는 것을 사참(事懺)이라고 한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상대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성품은 상대와 별개(別個)로 존재하거나 서로 반목하는 감정적인 요소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상대와 별개로 존재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지송하는 공덕이 쌓이게 되면 그 공덕의 위신력이 먼저 그 성품을 무너뜨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품이 먼저 무너져야만 한다. 왜냐 하면 이러한 성품을 유지하고 있는 한, 입에서 울려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듣는 자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지송하는 자가 뚜렷하게 별개로 강화되어 주객(主客)이 항상 분명하여 주인공과 주인공 밖의 사물이 하나가 될 수 없어 염불삼매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주인공 밖의 사물이 분명하게 존재할 때는, 탐욕과 진에, 대립과 경쟁, 반목과 시기 질투를 일삼게 됨으로 번뇌가 소멸되기보다 오히려 증장되기 때문이다. 즉, 성불(成佛)의 길보다 지옥의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반복해서 지송하는 가운데 번뇌가 점차 소멸되면서 상대와 내가 별개로 존재한다는 존재 개념에 변화가 오게 되어 필경에 나와 네가 별개가 아니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단계에 오르게 될 때 입에서 울려나오는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듣는 자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지송하는 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둘이 아님을 체험하게 된다. 이렇게 둘이 아닌 단계에 오르기 위해서는 끝없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계속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개유무시탐진치(皆由無始貪瞋癡) 내가 옛날에 지은 모든 악업은 시작이 없는 오랜 옛적부터 익혀온 탐진치(貪瞋癡) 삼독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탐진치(貪瞋癡)의 탐은 물질, 명예, 애정 등에 과분한 욕심을 내는 것이고, 진은 원한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나 욕심을 채우지 못하는 불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며, 치는 어리석은 것이니 탐욕이나 진에를 일으키는 것이 어리석음인데 이는 모두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기심이 어리석은 마음이다. 그리고 탐진치 삼독은 종신구의지소생(從身口意之所生)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좇아서 생겨난 것이다. 삼독은 다시 백팔 번뇌가 되고 백팔 번뇌는 팔만사천 번뇌가 되는 것이고, 팔만사천 번뇌는 팔만사천 병고(病苦)가 되는 것이다. 이 병고를 치유하기 위해 일체아금개참회(一切我今皆懺悔)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일체의 잘못에 대해 나는 지금 모두 참회한다. 우리는 번뇌와 병고(病苦)는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번뇌가 병고가 되기 전에 모두 참회하여, 미리병고(病苦)를 예방하는 처방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라. 참제업장(讖除業障) 십이존불(十二尊佛)

 

업장에 대한 참회를 확실하고 올바르게 하기 위해, 이를 증명하시는 열 두 부처님 전에서 진실한 참회를 한다. 그 열 두 부처님들의 명호(名號)는,

 

나무참제업장보승장불(南無讖除業障寶勝藏佛)

모든 업장을 참회하여 장애를 녹여 없애 주시는 보승장불(寶勝藏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아래 열한 분의 부처님 명호 앞에 나무참제업장이 생략되었다고 본다.

 

보광왕화렴조불(普光王火炎照佛)

보광왕(普光王)의 지혜의 화염(火炎)으로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화염조불(火炎照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일체향화자재력왕불(一切香火自在力王佛)

온갖 향화(香火)의 자재력(自在力)으로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자재력왕불(自在力王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백억항하사결정불(百億恒河沙決定佛)

백억 항하강의 모래알 수만큼 많은 부처님께서 결정적으로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결정불(決定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진위덕불(振威德佛)

덕(德)의 위엄(威嚴)을 떨쳐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진위덕불(振威德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금강견강소복괴산불(金剛堅强消伏壞散佛)

금강 같은 견강한 지혜로써 모든 업장을 소제(消除)하고 조복받고 무너뜨리고, 흩어지게 하시는 소복괴산불(消伏壞散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금강이 견강하다는 것은 불생불멸한 진아(眞我)의 자리를 의미한다.

 

보광월전묘음존왕불(普光月殿妙音尊王佛)

보광월전(普光月殿)에서 묘한 음으로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묘음존왕불(妙音尊王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

환희(歡喜) 창고에 가득 차 있는 마니 보배로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마니보적불(摩尼寶積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무진향승왕불(無盡香勝王佛)

다할 수 없는 수승(殊勝)한 향기로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무진향승왕불(無盡香勝王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사자월불(獅子月佛)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사자의 용맹과 지혜 월광(月光)으로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사자월불(獅子月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환희장엄주왕불(歡喜莊嚴珠王佛)

환희로써 장엄한 구슬로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주왕불(珠王佛)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제보당마니승광불(帝寶幢摩尼勝光佛)

제석천의 보배 깃발과 마니로 모든 업장을 소멸해 주시는 승광불에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지심으로 귀의합니다.

 

 

마. 십악참회(十惡懺悔)

 

위에서 이미 설한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삼업은 열 가지 악업으로 이어진다. 이들을 참회하여 정반대로 행하면 십선업(十善業)을 행하는 것이 된다. 열 가지 악업에 대한 참회는 신업(身業) 세 가지에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婬)의 중죄(重罪)에 대한 참회와 구업(口業) 네 가지에 망어(妄語), 기어(綺語), 양설(兩舌), 악구(惡口)의 중죄에 대한 참회와, 의업(意業) 세 가지에 탐애(貪愛), 진에(瞋恚), 치암(癡暗)의 중죄에 대한 참회를 합하여 열 가지이다. 이들을 명시(明示)하면:

 

살생중죄금일참회(殺生重罪今日懺悔)

투도중죄금일참회(偸盜重罪今日懺悔)

사음중죄금일참회(邪婬重罪今日懺悔)

망어중죄금일참회(妄語重罪今日懺悔)

기어중죄금일참회(綺語重罪今日懺悔)

양설중죄금일참회(兩舌重罪今日懺悔)

악구중죄금일참회(惡口重罪今日懺悔)

탐애중죄금일참회(貪愛重罪今日懺悔)

진에중죄금일참회(瞋恚重罪今日懺悔)

치암중죄금일참회(癡暗重罪今日懺悔)

 

열 가지 악업을 참회하여 열 가지 선업(善業)을 행하고자 하는 중생의 마음이다.

열 가지 선업(善業)이란 남을 죽여 원한을 사는 잔인(殘忍)한 살생(殺生)보다 남을 살리는 방생(放生)으로 생명의 은혜를 베푸는 자비심을 길러 덕(德)을 쌓아야 한다. 여기에서 가정(家庭)도 한 생명체(生命體)로 보아야 하고, 태아(胎兒)도 한 생명체로 보아야 한다.

살생 - 각기 다른 생명과 생명들이 서로 연기하여 생하고 유지되고 멸하는 것이 대우주의 법칙이다. 이와 같은 우주의 대원칙이 있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생성 유지 소멸하는 것이므로 임의로 남의 생명을 해치는 살생은 우주의 법칙을 위반하는 큰 죄라고 하시고 지켜야 할 계(戒) 중 가장 우선하는 계목으로 취급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남의 생명을 함부로 하면 네 목숨으로 대신 갚아야 한다”고 하셨다. 갑자기 요절하는 사람, 명이 짧은 사람 등은 전생의 업이나 금생의 업에 의해 그렇게 되는 것이라 한다. 사냥, 낚시, 살인 등이 이에 속한다.

 

투도 - 남의 것을 도둑질하여 남을 곤경(困境)에 빠지게 하는 투도(偸盜)보다 남에게 자비심을 베풀어 남을 기쁘게 하는 보시를 하여 복(福)을 지어야 한다. 국가의 재산을 도용(盜用)하는 것도 투도에 해당되며, 선용(善用)하는 것은 자비보시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각자 자기들의 인생을 투자해서 형성한 재물이다. 그러므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남의 귀중한 인생을 훔치는 것과 같아 재앙을 면할 수 없고 그 응보로 축생의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한다. 남을 시켜서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마음속에 그러한 마음을 가져서도 안 된다. 노력을 들이지 않고 크게 수확만 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 재앙의 문을 여는 것이다.

사음 - 사음(邪婬)하여 남편 혹은 아내를 괴롭히는 불륜(不倫)을 맺어 배우자의 가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어 청정한 마음을 어지럽히기보다, 서로 사랑하여 빈 마음으로 둘이서 하나가 되는 행으로 지혜와 복덕을 짓는다.

 

망어(妄語) - 자기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 남을 해치기보다, 남에게 이롭고 남을 편안하게 하는 말로 서로 하나가 되게 하고,

 

기어(綺語) -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비단결 같이 말을 꾸며서 일시적으로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보다, 남에게 이롭고 남을 편안하게 하는 좋은 말로 하나가 되게 하며,

 

양설(兩舌) - 자기의 이익을 위해 두 가지 다른 말을 하여 도덕성을 여의기 보다 남을 위해 진실된 말을 하여 화합을 이루게 하고,

 

악구(惡口) - 자기의 화를 참지 못하여 화를 내고 욕을 하며 악담을 하여 남을 괴롭혀서 원한의 벽을 쌓기보다, 화를 삭이고 부드러운 말로 남을 편안하게 하여 한결같이 하나로 되게 해야 한다.

남을 헐뜯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잘 되는 법은 없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남을 이기려고 하지 말고, 너 자신을 이기도록 해라.” “남을 헐뜯기보다 너를 먼저 헐뜯어라”라고 하셨다.

 

탐애(貪愛) - 재물이나 명예, 애정 등을 지나치게 탐하여 남에게 해를 끼치기보다 자비심으로 남을 이롭게 하여 하나 되게 하라.

재물, 명예, 애정에 욕심을 내는 마음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 마음 밑바닥에 ‘내’가 깔려 있는 마음이다. ‘나’가 깔려 있는 마음은 나와 남을 갈라놓고 서로 경쟁하고 반목하는 마음으로 발전하는 마음이기에 경계(警戒)한다.

 

진에(瞋恚) - 과거에 있었던 원한 관계로 분노를 터뜨리는 감정이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지 못해 화를 내는 경우 등이 있는데 화나 분노는 항상 더 큰 분노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어 살인이나 전쟁의 극악으로 치솟을 수 있는 무서운 감정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성냄보다 부드러운 마음으로 대하여 하나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한 순간에 백겁동안 쌓아 온 공덕이 한 순간에 사라진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좋은 사람과 무난한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어렵고, 좋은 이웃을 가지기 어렵다.

 

치암(癡暗) - 치는 어리석음인데 자기 밖에 모르는 마음이니 이를 어두움이라 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은 지혜로운 광명으로 표현한다.

재앙의 원인은 어리석음에 있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큼 생각하고, 반성하고, 살게 되어 있다. 아는 것만큼 밖에 생각할 수 없으므로 아는 것 이상으로 잘 살 수는 없으니, 살아 있는 한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깊은 신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기도하며 정진하고 정진하여야 한다.

 

진실한 마음으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거나 사경하여 모든 번뇌를 소멸시켜 독송하는 주체가 <신묘장구대다라니>와 일치하게 되면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

百劫積集罪 一念頓蕩盡 如火焚枯草 滅盡無有餘하게 된다.

 

백겁동안에 쌓인 나의 모든 죄업을 지극히 짧은 한 생각사이에 몰록 탕진(蕩盡), 녹여서 제거해 버리는 것이 마치 불씨 하나가 마른풀을 태워버리는 것과 같이 나의 죄업도 티끌만큼도 남김없이 다 소멸되어 지이다 하는 발원이다.

 

저 먼 과거로부터 백겁동안 쌓아 온 죄업이 한 생각 바로 함으로서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불교의 한 특징이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완전한 무죄체(無罪體), 즉 근본에는 죄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죄를 사하여 주십사 구원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즉 백겁동안 쌓인 죄라도,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한 생각에 모두 탕진해 버린다고 하여 절대자에게 의지함이 없이 스스로 죄를 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은 부처님의 분신(分身)이라 스스로 갈고 닦음에 따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성불(成佛)을 종교상의 구경의 목표로 세우고 있다. 이것이 아담과 이브의 죄로 사람을 원죄체(原罪體), 즉 근본부터 죄가 있다고 보고 그 원죄는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구원을 청하여야 하고, 사람 자신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점이다.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

罪亡心滅兩俱空 是則名爲眞懺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의 자성(自性)이란 자기의 본성이란 뜻으로 실체(實體)라고도 하는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죄라는 것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라 오직 마음 따라 일어나는 것이니,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이 멸할 때, 죄 또한 없어지고,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지은 죄가 없어지고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멸하여 양쪽이 동시에 함께 공해 지는 것을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곧 진실한 참회라 한다.

 

이 사구게(四句偈)는 앞 사구게(四句偈) 중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을 부연하여 설명하는 게송이다. 백겁동안 기나 긴 세월동안 쌓인 죄라 하더라도 한 생각이라고 하는 짧고 짧은 순간에 몰록 녹여서 모두 없애버린다는 게송이 어떻게 하여 진실한 것인가를 설하고 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의 죄무자성(罪無自性)은 죄라는 것이 본래 변하지 않는 고정된 죄라는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니,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지은 죄를 씻을 수도 있으며, 또한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불교의 무죄론(無罪論)을 설하는 구절이다. 이는 다른 종교의 원죄론(原罪論)과 차이가 있는 점이라는 것을 위에서 설명하였다. 종심기(從心起)는 죄란 마음 따라 일어난다고 했는데 이 때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과 공생(共生), 공존(共存), 상의(相依)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利己心)의 마음이다. 공생, 공존, 상의하는 마음은 우주의 진리인 연기법에 순응하는 마음이니 공덕을 쌓는 좋은 마음이다. 한편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은 우주의 진리에 순응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해치는 언행을 함부로 하는 마음이니 연기법을 어기어 죄를 짓는 마음이다. 이 두 가지 마음 중에서 어느 마음이 그 때 그 때 상황에 직면해서 일어나느냐에 따라 죄를 짓기도 하고 공덕을 쌓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의 심(心)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利己心)의 마음이니, 이 이기심이 소멸될 때, 죄 또한 없어진다고 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이기심과 이타심(利他心)이 있으니, 만일 이기심을 소멸하면 이타심만 남게 된다. 이 이타심이 공생(共生), 공존(共存), 상의(相依)하는 마음이고 무위심(無爲心)이다.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則名爲眞懺悔) 과거에 지은 죄를 없애고 현재의 이기심을 멸하여 양쪽이 다 함께 공해졌을 때 이것을 곧 진실한 참회라고 한다. 즉 이와 같이 죄란 마음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진실한 참회를 하면 과거에 이기심으로 지었던 죄와 현재의 이기심이 동시에 그리고 즉시 공(空)해버린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이 가능함을 설하고 있다.

 

인간의 원죄론(原罪論)에 비하여 불교의 무죄론(無罪論)을 설명하는 게송이다. 죄라는 것은 원래 없는 것이나 한 생각 잘못했을 때 일어난다. 자기중심적으로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거나, 이것은 예쁘고 저것은 추하다고 하는 분별심은 집착을 낳고 집착이 심하면 죄를 짓게 된다. 이러한 분별심이 없어지면 집착이 없어지고 집착이 없어지면 죄를 지을 이유가 없다. 관세음보살 기도나 참선을 열심히 하면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이기심에 의한 분별망상이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곧 참된 참회이다.

 

진정한 참회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을 함께 병행하여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 이기적인 욕심을 내는 마음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야 한다. 이와 같이 할 때 완전한 참회가 되어 업장을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지은 죄도 없고 분별 망상심도 없는 정말 청정무구한 경계가 진참회(眞懺悔)의 경계이다. 이 진참회의 경계가 곧 부처님의 경계가 되고, 이 부처님의 경계는 곧 무위심(無爲心)의 경계이고 무위심의 경계에는 무위심내기비심(無爲心內起悲心)이 있다.

 

죄를 짓는 마음은 유위심(有爲心)이나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를 지었다고 알려주는 자가 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죄를 심판하는 능력 있는 자가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무죄체(無罪體)이고 불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죄체이기 때문에 유죄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바. 참회진언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3번)

 

옴: 진언의 왕, 우주의 핵심, 항복, 조복, 설복 / 살바: 일체 / 못자: 붓다 / 모지: 보리 / 사다야: 살타에게 / 사바하: 구경, 원만, 성취

이를 모두 합치면,

우주의 핵심이시여! 일체 붓다 보리살타에게 귀의하오니 원만히 성취하게 하소서! 이다.

참회진언이 일체 부처님과 보리살타에게 이 목숨이 다 하도록 귀의하겠다는 의미는 곧 모든 참회의 근본은 우선 불보살님께 귀의함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마치 우리들이 부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탈선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름지기 불보살님께 귀의하였기에 불보살님이 원하시는 대로 삶을 살아가고자 천수경을 끊임없이 독경하고 기도하며 정진하는 것이다.

 

 

 

 

제5장 준제진언

 

이 장에서는 준제의 공덕, 준제보살, 네 가지 진언의 순서로 설하고 있다.

 

가. 준제의 공덕

 

준제공덕취(准提功德聚) 적정심상송(寂靜心常誦)

일체제대난(一切諸大難) 무능침시인(無能侵是人)

천상급인간(天上及人間) 수복여불등(受福如佛等)

우차여의주(又此如意珠) 정획무등등(定獲無等等)

 

준제공덕취(准提功德聚) 적정심상송(寂靜心常誦)

준제의 청정한 공덕의 큰 덩어리를 적정한 마음으로 항상 외우면,

준제공덕취의 준제는 ‘청정’을 뜻한다. 청정한 백색광명 속에 모든 공덕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청정을 이루는 것은 모든 번뇌 망상을 잘 다스림에서 오는 것이다. 위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여 ‘준제’를 얻을 수도 있고 아래 네 가지 진언을 지송하여도 모든 번뇌 망상을 여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체제대난(一切諸大難) 무능침시인(無能侵是人)

일체 모든 대재난(大災難)이 그를 능히 침범하지 못하고,

일체제대난(一切諸大難)이란 천재지변(天災地變)에서 오는 고난이나, 전쟁에서 오는 고통, 사업 또는 일상생활 중에서 사기 질투 모함 간음 등에서 오는 여하한 고난이라 하더라도 대비주를 항상 외우는 사람을 침범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예를 들면 지난 카트리나 태풍으로 뉴올린스 도시에 인명피해가 많았지만 대비주를 외우는 사람은 그 때 우연히 휴가차 또는 다른 이유로 그 곳을 떠나 있어 수재를 피했을 수도 있다.

일체재난을 피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청정한 마음에 의하여 피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천상급인간(天上及人間) 수복여불등(受福如佛等)

수행이 잘된 천상의 신(神)들이나 수행이 아직 미숙한 보통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받는 복은 부처님과 동등하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천상 인간 부처가 모두 평등함을 설하고 있다. 누구나 대비주를 고요한 마음에서 항상 외우면 부처가 되어 부처님께서 받으신 복과 동등한 복을 받게 된다는 뜻이니 불교의 평등사상을 보이는 구절이다.

이 가르침은 부처, 천상, 중생은 본래 하나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일원론(一元論))에 의한 것인데, 이 일원론은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였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이원론(二元論)과 다르다. 이원론에 의한 사상은 매사에 이분법(二分法)적인 개념으로 접하여 대립과 반목 경쟁과 투쟁의 역사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중생도 부처와 같은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일원론적 사상에서는 상대가 나와 다르다고 하여 분리시켜버리려고 하거나, 배척하거나, 다투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상대에게 수승한 점이 있으면 배워 자기를 개선하고 자기의 좋은 점을 상대에게 가르쳐 그를 도와줌으로서 서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논리를 화쟁론(和諍論)이라 하는데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남과 다투는 것을 싫어하고 화합하고자 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사상에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지옥과 열반이 둘이 아니라는 설이 나온다. 이러한 인연에서 중생도 부처와 같은 복을 받는다는 말이 성립하지만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복을 받는다는 말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차여의주(又此如意珠) 정획무등등(定獲無等等)

또 이 여의주로써 결정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여의주(如意珠)는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보배 구슬이나 여기에서는 준제공덕취를 의미하니 청정한 공덕의 무더기를 고요한 마음으로 항상 외우면 여의주를 얻게 되어 위없는 큰 깨달음을 반드시 얻게 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기도를 지극정성으로 하면 여의주를 얻어 최상의 법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니 이것 역시 불교의 평등사상을 설하는 구절이다.

이 게송을 다시 뜻 번역하면,

 

준제란 청정함 속에는 온갖 공덕이 가득하니

고요한 마음으로 항상 외워 간직하면

이 세상의 아무리 크나큰 어려움도

능히 이 사람을 침범하지 못하고

천상이나 인간세상 그 어떤 중생도

부처님과 다름없는 큰 복을 받으며

그 누구라도 이 여의주와 같은 준제로써

결정코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되리!

 

 

나. 준제보살

 

나무칠구지불모 대준제보살 (3번)

 

나무 : 이 목숨 다하여 귀의합니다 / 칠구지 : 7천억 / 불모(佛母) : 부처님의 어머니 / 준제보살 : 밀교에서 분류하는 칠관음 중 한 관음이시다.

이를 해석하면 ‘칠천억 부처님의 어머님이신 대준제보살님을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받으옵니다’이다.

 

칠관음은 성관음(聖觀音), 천수관음, 마두관음, 십일면관음, 여의륜관음, 준제관음, 불공견색관음이다. 준제관음보살의 형상은 세 개의 눈에 열여덟 개의 팔을 가진 것이 정형이며, 이 때 세 개의 눈은 중생의 세 가지 장애인 미혹(迷惑)과 죄업(罪業)과 괴로움[고(苦)]을 바르게 보고 열여덟 개의 팔로 남김없이 제거하여 청정한 마음을 갖게 해주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이 관음은 중생의 재앙을 없애주고 소원을 성취시켜 주며, 수명을 연장시켜 주며, 지식을 구하는 이의 원을 성취시켜 주고,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권능이 월등하다고 하여, 일부 승려들은 이 관음보살을 신봉하고 있다.

그런데 왜 준제관음보살을 불모(佛母)라고 한 것일까? 그 까닭은 준제보살이 우리의 청정한 근본 마음자리이기 때문이다.

 

불모(佛母)는 부처를 낳고 양육하는 부처의 어머니로서, 불교에서는 이를 다양하게 표현한다. 반야경(般若經)에서는 반야지(般若智)가 불모(佛母)요, 열반경에서는 불성(佛性)을, 선(禪)에서는 무심(無心)을 불모로 보고 있으며, 준제경에서는 청정을 불모로 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청정한 마음자리가 곧 부처를 만들고 기르는 불모이므로, 청정한 마음을 뜻하는 준제관음보살을 ‘불모’라고 한 것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지송함으로서 청정한 마음자리를 성취하는 것이므로 준제관음보살의 뜻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청정한 마음자리를 기필코 성취하기 위하여 거듭 준제보살을 설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우리는 ‘나도 부처가 되겠다’는 원을 가득 담아 7천억의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대준제보살님께 귀의함으로서 그를 닮아 가고자 하는 것이다.

 

“내 안에 이미 계시는 대준제보살, 청정하고 청정하여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반야지혜라고도 하는 준제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바로 이러한 본질을 새기며 “나무칠구지불모 대준제보살”을 세 번 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목숨이 다하도록 참선, 기도, 간경, 염불, 주력 등에 의지하여 마음의 청정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다. 네 가지 진언

 

대준제보살에 대한 귀의에 이어 정법계진언, 호신진언,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 준제진언의 네 가지 진언이 나온다. 이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1)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옴 남

   옴 남

   옴 남

 

옴: 우주의 핵심, 소리의 어머니, 진언의 왕, 항복, 조복, 섭복 등 여러 가지 의미와 신비한 힘을 가진 진언의 정형구.

남: <람>이라고 해야 하는데, 화대(火大)의 종자라는 뜻이다. 즉, 불을 일으키는 근본 씨앗이란 뜻인데, 그것은 지혜의 불이다.

‘옴 남’은 그 불의 종자가 탐진치 삼독으로 인해서 생긴 우리의 번뇌 망상을 다 태워버리고 깨달음의 문에 들어서게 하는 진언이다.

정법계진언은 법계를 정화하는 진언이다. 법계는 법, 즉 진리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진리가 지배하는 세계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계 등 모든 세계를 다 포함하여 법계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법계를 어떻게 정화한다는 것인가?

 

정법계진언 “옴 남”을 끊임없이 지송하면 지혜의 화염이 우리의 번뇌 망상을 다 태워버리고 깨달음의 문에 이르게 하고 깨달음의 문에서 일념삼매에 들어가면 나머지 모든 번뇌 망상이 저절로 사라져, 완전히 맑아지게 된다. 화두삼매에 들건, 염불삼매에 들건, 독경삼매에 들건 마찬가지이다. 모든 법계를 깨끗하게 하는 지름길은 일념삼매이다. 어떠한 번뇌 망상도 붙을 수 없는 일념삼매! 이보다 더 확실한 정화법은 없다.

 

누구나 일념삼매에 들면 ‘나’는 청정해지고, ‘내’가 청정해지면 법계와 둘이 아니게 된다. 법계와 둘이 아니게 되면, 우주법계가 모두 청정해지고, 우주법계가 맑아지면 나도 또한 맑아진다. 내가 깨달으면 법계를 알게 되고, 법계를 알면 ‘나’를 알게 된다. 우주와 나는 불이(不二)이므로, 일념삼매의 법으로 ‘나’를 맑히면 온 법계가 깨끗해지는 것이다.

정법계진언은 법계와 아울러 ‘나’를 맑게 만드는 일념삼매법이며, 이러한 도리인 우주법계의 핵심을 표현한 음이 ‘옴 남’인 것이다.

 

2) 호신진언(護身眞言)

   옴 치림

   옴 치림

   옴 치림

 

치림: 치림의 원음은 <쓰림>이다. 그 뜻은 묘길상(妙吉祥)의 종자이다. 모든 길상이 <치림>이란 글자에서 나온다. 길상이란 행복, 영광, 번영, 안녕, 평화 등 좋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몸을 보호한다고 해서 신장(神將)이나 그 밖의 어떤 것이 내 몸을 지켜준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몸을 보호하는 모든 좋은 일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청정하게 지키지 않을 때 탐진치 삼독에 의한 인과가 나에게 점점 더 해롭게 다가옴으로 밖으로부터의 보호가 필요하지만, 청정한 나에게는 청정한 인과가 다가올 것이므로 항상 나의 청정함에서부터 호신(護身)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탐진치 삼독 쪽으로 나아가려는 ‘나’를 계정혜 삼학 쪽으로 나아가게 하고, 악업을 선업으로 돌리고, 번뇌 망상을 보리(菩提)로 바꾸어 가야한다. 그 방법으로 가장 빠르고 좋은 것이 일념삼매법이며, 우주법계의 핵심으로 표현한 “옴 치림”이다.

 

일념삼매에 들면 ‘나란 본래 없다. 비워버려라’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어 위급한 상황에서 당황하는 일이 없게 된다. ‘나’는 영원하다는 이치를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3)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본심미묘(本心微妙)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옴 마니 반메 훔(3번)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을 풀이하면 ‘관세음보살의 본래 마음은 미묘하며 밝음 중에 으뜸인 대명왕(大明王)을 여섯자로 표현한 ’진언’이란 뜻으로 이것은 <광명진언>의 내용을 축소시킨 것이다. 대명왕(大明王)이란 크게 밝고 권력이 가장 세다는 뜻이니 밝음 중에 으뜸인 대명왕이라 했다.

 

옴 aum : a는 시초음이고, u는 과정음(過程音)이며 m은 종결음(終結音)으로 aum은 이 우주만유의 처음이자, 과정이며, 마지막을 이루는 근본 힘이라는 뜻이다. 이 뜻에서 우주의 핵심, 소리의 어머니, 진언의 왕, 항복, 조복, 섭복 등 여러 가지 의미와 신비한 힘을 가진 진언의 정형구로 사용하고 있다.

마니 mani : 마니구슬, 여의주. 마니보주(摩尼寶珠)는 지극히 맑고 투명하여 붉은 것이 오면 붉게 변하고, 푸른 것이 오면 푸르게 변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가 버리면 본래 투명한 그 자체로 돌아온다. 이러한 ‘마니’의 성질을 우리들 자신의 때 묻은 청정한 마음에 비유하고 있다.

 

반메 padme : 원래 ‘빠드메’이다. 그 뜻은 연꽃이다. 연꽃 중에서도 홍연(紅蓮)에 해당한다. 연꽃의 본성은 아무리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항상 깨끗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리고 연꽃은 다른 꽃과 달리 열매를 같이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인과론을 상징한다고 본다. 우리의 본성도 연꽃처럼 물들지 않는 성질을 근본으로 함으로 여기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관세음보살을 나타내는 동시에 우리가 수행을 쌓아서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 되었을 때도 연꽃에 비유한다. 어려운 과정을 해치고나와 이상적인 인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여의주’나 ‘연꽃’이 뜻하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마음을 본래 청정한 그대로 오롯이 간직할 때 그것이 바로 지혜, 자비, 광명 등 온갖 공덕이 갖추어져 있는 불보살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훔 hum : 이구청정(離垢淸淨)이라고 해서 ‘더러움을 벗어난 청정한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 즉, 번뇌 망상이 모두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티끌이 있는 옥에서 티끌을 씻어내고 순수한 옥을 나타냈다는 의미이다. 즉 더러움에서 깨끗함을 얻은 것이나 깨끗함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더러움에 묻혀있었던 깨끗함을 순수한 깨끗함으로 하였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면 모든 악업이 소멸되고 복덕이 생겨날 뿐 아니라, 일체의 지혜와 선행의 근본이 된다고 하여 일찍부터 널리 염송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티벳이나 몽고 등에서는 대부분의 불자들이 평생토록 이 진언만 외우는 경우도 많다.

티벳어 경전인 <마니캄붐>에 의하면 아미타부처님께서 몸을 나투시어 말씀하시기를,

 

대자 대비한 성관음(聖觀音)은 ‘옴 마니 반메 훔’의 여섯 자에 의해 육도에 있는 생사의 문을 닫는다. 옴은 천, 마는 아수라, 니는 인간, 반은 축생, 메는 아귀, 훔은 지옥의 문을 닫느니라. 이 여섯 글자가 육도를 완전히 비게 할 것이니, 마땅히 반복하여 염하고 지닐지니라.

 

아울러 이 주문을 외우면 무량한 삼매와 법문을 갖추게 되고, 다함없는 변재와 청정한 지혜를 갖추게 된다고 하였다.

정녕 이 세상에서 가장 맑고 밝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본 고향인 마음자리이다. 그것을 육자대명 왕 진언에서는 ‘마니’요 ‘반메’요 ‘훔’이라 하였다. 곧 어떠한 것이 오더라도 그와 화합하지만 변하지 않는 마니보주와 진흙 속의 연꽃, 구속 속의 해탈, 중생세계 속의 극락세계를 ‘옴 마니 반메 훔’이라 한다. 망상을 다 없애고 나서 새로이 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번뇌 망상 속에서 부처가 되는 도리가 ‘옴 마니 반메 훔’이다. 마치 흙탕물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이러한 도리를 알고 ‘옴 마니 반메 훔’을 외우면 그야말로 마음으로부터 광명이 샘솟게 된다. 내 마음이 대명왕(大明王)이 되면서 일체의 장애가 사라지고 깨달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4) 준제진언(准提眞言)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다냐타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

 

<나무 사다남 삼먁삼못다 구치남 다냐타>는 다음 문장의 도입구절이다.

나무: 귀의한다 / 사다남: 완성, 성취 / 삼먁: 정등(正等) / 삼못다: 정각(正覺), 붓다 / 구치: 천만억 / 남: 복수 / 다냐타: (진언을) 설해 가로되(이어주는 말).

이를 모두 합치면, ‘칠천만억의 정등(正等) 정각(正覺)을 이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그러하오니’가 된다.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이 진짜 준제진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자례: 동회존(動回尊), 유행존, ‘움직이고 흘러 다니는 분이시여’라는 뜻 /

주례: 두상(頭上) 정계존(頂髻尊)이시여, 정계(頂髻)란 제일 높은 부처님의 두상(頭上) / 준제: 묘의(妙意) 청정존이시여 / 사바하: 원만 성취 / 부림: 전륜왕의 종자. 전륜왕은 머리에 법륜과 같은 수레바퀴를 달고 있는 신장.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대장격에 해당한다.

이를 모두 합치면, 옴, 동회존(動回尊)이시여, 두상(頭上) 정계존(頂髻尊)이시여, 묘의(妙意) 청정존이시여 원만히 성취하게 하소서, 전륜왕(轉輪王)의 종자를 성취하게 하소서!

 

『칠구지불모준제대명다라니경』에서는 준제진언이 “모든 재앙을 소멸케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을 신속하게 얻게 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준제진언은 그 어떤 진언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장(魔障) 또한 크다고 하여 함부로 외우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준제진언을 외우는 수행자는 자기의 근기에 맞는 진언인지 점검해야 한다.

준제진언은 깨달음을 얻음으로 해서 오는 불사의업(不思議業)의 작용을 곧 바로 일러주고 있다. 준제진언을 외우는 수행자 또한 그 마음가짐을 크게 가져야 한다. 그리고 대원을 세워 준제진언을 외우는 공덕을 널리 회향하는 발원을 해야 한다. 그 발원문은 아래와 같다.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제가 지금 준제진언을 지극하게 지송하오며

보리심을 발하옵고 광대한 원 세우옵니다.

원하오니 선정과 지혜 속히 원만히 밝아지고

모든 공덕 남김없이 모두 성취하여 지이다.

원하오니 수승한 복으로 모든 방편 두루 갖추어

모든 중생 다함께 불도를 이루어 지이다.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

지송(持誦)의 지(持)에는 계속해서 유지한다는 뜻이 있으니 지송(持誦)은 소기의 목적을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끝없이 독송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지금 대준제진언을 지송한다’는 뜻은 내가 지금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한도 끝도 없이 정등(正等) 정각(正覺)을 이룬 부처가 될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대서원이다. 이러한 이유로 준제진언을 나무 칠구지 불모(佛母) 대준제보살이라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마음 자세로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영감이 생긴다. 삶을 살아가면서 영감이 비교적 다른 사람보다 수승한 사람들이 보다 경건한 삶을 살아가고, 상대방에 대한 자비심도 많고, 선심이 두텁고, 좋은 인간성을 갖춘 사람들이다. 영감이 강한 사람들은 맑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 맑은 마음으로 생각하고 맑은 마음으로 결정하는 사람의 미래는 항상 맑고 아름답게 전개되어 간다. 맑은 마음이 아니면 선택의 카드를 올바로 잡지 못해 실수하는 비율이 높아진다. 영감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판단을 정확하게 내릴 수 있는 확률이 높지만 영감이 없는 사람은 항상 어두운 밤길을 가는 기분이다.

 

자신에게 보다 맑은 영감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항상 경건하게 기도하면서 살아가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생기고, 영감이 생김에 따라 미래의 문이 활짝 열린다. 모든 성공한 과학자, 의사, 사업가, 정치가는 모두 남보다 탁월한 영감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금지송대준제(我今持誦大准提)를 하면 즉발보리광대원(卽發菩提廣大願)이 일어나는 것이다. ‘발보리’란 깨달음의 길을 나가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광대원’은 넓고 큰 원이라는 뜻으로 나만 잘 살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고 구제하여 이 세상의 빛이 되고 등불이 되겠다는 서원이다. 처음에는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로 기도하다 보면 기도의 의미를 체험하게 된다. 그 깊은 의미를 체험하게 되면 더 크고 넓은 발심을 하게 된다.

 

원아정혜속원명(願我定慧速圓明)

‘원하옵건데 정(定)과 혜(慧)가 속히 원만하게 밝아지게 하여 주소서’라는 발원이다. 기도를 계속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맑아지고 밝아져서 원만하고 지혜로워진다. 마음이 밝아지면 모든 것이 잘 보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런 세계가 열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정(定)과 혜(慧)의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작업이 곧 기도와 참선이다. 정(定)은 모든 번뇌 망상이 소멸되어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고, 혜(慧)는 안정된 마음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아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지혜이다.

 

마음이 뚜렷이 밝아지면 보통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기도를 열심히 하면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마음의 폭도 넓어져 마음의 세계가 넓어진다. 마음의 세계가 넓어짐에 따라 모든 것이 뚜렷이 밝게 보인다. 세월이 지나면 이런 사람들은 저절로 남다른 공덕을 짓게 된다.

 

원아공덕개성취(願我功德皆成就)

밝은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많은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고 행복하게 하여 중생 모두 크고 넓은 모든 공덕을 이루게 하여 주소서라는 발원이다. 맑고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중생을 위해 수승한 공덕을 짓게 된다.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

‘원하옵건대 모든 것을 두루 장엄할 수 있는 수승한 복을 얻게 하여 주소서’라는 발원이다. 남을 도울 수 있는 여러 가지 필요한 방편이 두루 갖추어져 크고 넓은 공덕을 모두 성취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수승한 복덕이 되고, 수승한 복덕을 지은 마음은 곧 부처님의 마음으로 장엄된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원공중생성불도(願共衆生成佛道)

‘원하옵건대 모든 중생들이 함께 성불하여 지이다.’ 우리들의 삶의 구경(究竟)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돈도 명예도 애정도 구경의 목표로 가는 한 여정에 불과하다. 성불만이 모든 불자들의 이상이다. 이 점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만 구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타종교와 다른 점이다.

 

이것이 바로 준제진언 뿐만 아니라 모든 진언과 다라니를 외우는 기본자세이며, 이러한 대원을 품고 외우면 마장에 걸리지도 않는다.

소원은 처음 기도 시작할 때와 마지막 끝날 때 한번씩만 생각하고 기도 자체에만 일념으로 집중해야 한다. 그래서 기도와 자기 자신이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오롯한 정신상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어야만 힘이 솟아나고 또한 그 힘을 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도의 대상이 관세음보살이라면 그 관세음보살과 자신의 힘이 하나로 합쳐질 때 자유자재로 그 힘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역경이 다가오고 죽음이 닥칠지라도, ‘나’는 일념삼매를 통하여 부처를 이루는 이 길을 그냥 갈 뿐이다. 결단코 ‘나’의 본성을 깨달아 생사윤회의 길을 벗어나서 모든 이들과 함께 불국정토로 나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지송해야 한다.

 

이러한 대원을 기초로 삼아 일념삼매를 이루는 선정과 지혜를 밝게 닦아나가면 일체중생을 살리면서 사는 힘을 갖출 수 있게 되고, 일체 중생을 살리는 그 수승한 복은 다시 우주법계를 장엄하게 되어,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일체 중생 모두가 다함께 성불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제6장 여래십대발원문

 

우리가 참회를 하여 업장을 소멸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좌표를 설정하기 위함이다. 금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원한 생명이 세세생생 걸어 가야할 좌표를 지금 이 자리에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 좌표는 곧 우리들이 영원히 가야할 삶의 희망이 되고, 희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힘을 생산하는 동력이 된다. 이 희망과 동력이 원력이 되어 우리들이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이므로 원력이 곧 생명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힘은 곧 원력에서 나오는 것이요, 원력은 곧 생명력이다.

 

대부분의 재가신도들의 원은 ‘남편이 이번에 꼭 승진하게 해 주십시오’, ‘아들 딸 좋은 대학에 진학하게 해 주십시오’, ‘건강하고 무사하게 해 주십시오’, ‘더 편안하고 풍요롭게 해 주십시오’ 등이다. 소박하고 현실적인 당연한 원이다. 그리고 더 큰 원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러한 소박한 가정적인 문제들이 기본적으로 갖춰져야 하리라고 본다. 『천수경』에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보다 더 큰 원을 세우게 하기 위해 여래의 열 가지 큰 발원문을 설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래십대발원문(如來十大發願文)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여래께서 발원하신 이 열 가지 발원문은 두 가지 의미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여래께서 모든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서 필요한 발원문을 설하셨다고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여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와 같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발원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라 해도 상관없지만 공부하는 수자(修者)의 입장에서는 후자의 경우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

삼악도(三惡道)는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세계 중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이다. 원아영리삼악도(願我永離三惡道)란 이와 같은 윤회의 사슬을 영원히 여의게 하여 주소서라는 서원이다. 그런데 이러한 악도의 세계가 우리들 마음 밖에도 있지만 우리들의 마음 안에도 지옥의 마음, 아귀의 마음, 축생의 마음이 있다.

 

지옥의 마음이란 우리들의 삶 가운데 문제성이 많은 마음이다. 내 마음에 문제성이 많으면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와 같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가 가는 길로 남을 끌고 가려는 속성이 있어서 그와 인연된 사람들은 모두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게 된다. 테러가 그 예로 사람을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살해해 놓고도 뻔뻔스런 악마의 탈을 쓴 사람들도 있다.

 

아귀의 마음이란 굶주린 귀신의 마음이라 무엇이나 보는 대로 탐을 내 남의 사정은 전혀 볼 줄 모르고 자기 배만 채우려고 교묘한 수로 남을 속여 이익을 챙기거나 강도질을 하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인데 현재 우리 사회에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축생의 마음이란 동물 같은 마음이란 뜻인데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살면서도 전혀 사람 같지 않은 짐승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뉴오린스 수재로 많은 사람들이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고 있는 와중에도 총을 쏘고 불을 지르며 강탈을 일삼은 사람들이 있었다하니 수심(獸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이 어렵고 힘겹고 험난한 것은 이러한 삼악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 항상 기도 정진하는 마음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모든 악도를 영원히 멀리 여의겠다고 아무리 생각하고 있어도 지식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기도 정진하는 행이 반드시 따라줘야 모든 악도를 영원히 멀리 여읠 수 있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끝임 없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

하루 빨리 탐진치를 끊기를 원한다는 서원이다. 탐욕의 마음이란 내 마음 가운데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마음이다. 자기의 이익만을 취하려고 하고 남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마음이 탐욕이다. 이 탐욕이 지독하게 심하게 되면 아귀의 마음으로 변한다. 탐욕의 마음은 순리적으로 자기 노력의 대가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노력의 대가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항상 불만이 많고, 불만이 깊어지면 화를 내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람은 현명하지 못함으로 어리석다고 한다. 탐욕은 화를 낳고 화는 어리석음을 낳으며 자기의 주변을 온통 공포에 싸이게 한다.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탐욕은 아귀악도와 비교되고, 불만은 괴로움의 원인이므로 지옥악도와, 화냄은 아수라와, 어리석음은 축생악도와 비교된다. 그러므로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를 영원히 여의기 위해서는 탐진치 삼독심을 하루 속히 끊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원아속단탐진치(願我速斷貪瞋癡)를 발원하는 이유이다.

 

남의 것을 뺏고자하는 탐욕을 대치(對治)하기 위해 보시바라밀을, 화냄을 대치하기 위해 인욕바라밀을,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위해 지계바라밀과 정혜(定慧)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육바라밀 수행은 불법승 삼보를 믿고 기도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원아상문불법승(願我常聞佛法僧)

‘불법승 삼보를 항상 듣기를 원한다’는 서원은 부처님께 항상 공양 올리고 기도하며, 부처님의 생애 팔상성도를 새겨보는 마음을 가지며, 스님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 연기와 중도에 관하여 배우고 그에 따라 행하며, 스님은 욕계, 색계, 무색계를 초월하는 공덕을 닦는 수행자이니 그들을 공경하는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기도한다는 것은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는 기초단계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아들 딸 남편 아내를 위해 불공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으며, 나아가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도 부처님께 불공 올리고 기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 불공올리고 기도하는 마음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의 싹을 틔워 선학원에 다니면서 불법을 배우게 된다. 불법을 배움으로써 탐진치가 개인에게, 사회에, 국가에 미치는 문제를 인식하게 되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포괄적인 해법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수행이다.

 

원아근수계정혜(願我勤修戒定慧)

계정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기를 원한다는 서원은 앞에서 불법승 삼보에 대하여 항상 듣기를 원한다는 서원에서 실천하는 서원으로 넘어온 것이다. 여기에서의 계(戒)는 육바라밀 중 보시 지계 인욕 정진바라밀을 포함한 계로 보아야 한다.

 

계를 지킨다는 것은 일체 중생이 연기한다는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수순한다는 뜻이다. 연기하기 때문에 내가 계를 지키면 그 과가 나에게 오고, 계를 지키지 않으면 지키지 않은 과가 나에게 온다는 원리이다. 남을 위해 공덕을 지으면 그 공덕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지만 남을 해(害)하면 그 해가 돌아 결국 나에게 온다는 우주의 법칙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육바라밀은 과거 생이나 금생에 알게 모르게 남에게 해롭게 한 과보를 소멸하기 위해 보시바라밀 수행을 계를 지키는 덕목 중 가장 으뜸으로 꼽는다. 보시바라밀은 과거에 지은 빚을 갚고 새로운 복을 쌓는 공덕이 되어 탐욕심이 변하여 평화로운 마음이 되게 한다.

 

오계(五戒)를 지키고 보살계(菩薩戒)를 지키는 것은 살생해서 지은 원한, 도둑질해서 지은 원한, 사음해서 지은 원한, 거짓말해서 지은 원한 등 모든 원한을 갚고 마음에 안정을 가져오게 한다. 인욕바라밀은 모든 화낼 일들을 지혜로서 슬기롭게 넘겨 화낼 일이 없게 한다. 정진바라밀은 더욱 열심히 보시 지계 인욕 바라밀을 정진하여 정념(正念)에 들게 하고 정념은 다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들게 하고, 선정삼매는 지혜바라밀을 낳게 하여 모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와 같은 바라밀을 통해 부처님의 집에 들어가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게 된다.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

수(隨)에는 수행원이 되어 받들어 따라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따라서 원아항수제불학(願我恒隨諸佛學)은 항상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겠다는 서원이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절에 열심히 다니고 절에서 가르치는 불법을 바르게 배워 바르게 행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 Sam Myak Sam Bodhi),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서원이다. 부처님께서도 수많은 전생에서 불퇴전(不退轉)의 마음으로 꿋꿋하게 구도자의 길을 걸어오셔서 금생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셨다. 목표가 원대하면 원대할수록 고통과 역경의 골은 깊은 것이기에 퇴전하기 쉽다. 그러나 고통과 역경을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마니보주로도 볼 수도 있기 때문에 퇴전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고통과 역경이 없이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생에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정진할 뿐이다.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불퇴전의 마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인 사람에게는 결국 번뇌와 마장이 모두 녹아내려 무한한 즐거움의 세계에 들게 된다. 이 즐거움의 세계를 안양국(安養國)이라고도 하고 극락세계 혹은 열반이라고도 한다. 지고(至高)한 복락(福樂)의 세계이다.

 

수행을 거듭하면 할수록, 번뇌를 극복하면 할수록, 우리들 마음속에 한없는 평화와 안락의 경계가 열려가는 것을 체험한다. 끊임없는 수행 가운데 물질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속박을 이겨내게 되고, 그 결과 차원이 다른 즐거움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다. 마음이 먼저 극락이 되지 않으면 극락에 갈 수 없으니, 우리의 마음을 극락으로 만들어가는 비결은 한없는 수행이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끊임없는 수행을 감행하는 것이다. 결정코 극락에 나게 될 것이다.

 

원아속견아미타(願我速見阿彌陀)

아미타부처님을 하루 속히 만나기를 발원합니다. 불퇴전의 마음으로 결정코 안양국(安養國)에 도달하였으니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발원이다. 친견은 곧 본성을 보는 것이므로 성불을 뜻한다.

 

범어 ‘아미타’를 시간적으로 번역하면 무량수(無量壽)이고, 공간적으로 번역하면 무량광(無量光)이다. 한량없는 수명과 한량없는 광명 그 자체인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참으로 무량한 복덕을 지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불퇴전의 마음으로 기도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가능해져 모든 일이 순조로이 풀려나가는 법이다. 그리고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면 성불의 대도를 성취한 것이다. 아미타불의 광명과 ‘나’의 광명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성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건너야 할 수행단계는 수많은 고행(苦行)이 따르겠지만 그 때마다 불퇴전의 마음과 헌신적인 마음으로 극복해 가야 아미타부처님의 자비광명을 구경에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

분신(分身)이란 내 몸이 수많은 미진(微塵)으로 나누어진다는 뜻인데 내 마음이 수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어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변진찰(遍塵刹)은 우주 곳곳마다 두루 있는 것을 의미한다. 원아분신변진찰(願我分身遍塵刹)은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우주 곳곳에 두루 있게 되기를 원한다는 발원이다. 위에서 아미타부처님을 뵙고 성불하였으니 몸을 자유자재로 어느 때 어느 곳에나 나툴 수 있는 몸이 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우주 곳곳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그 사람의 마음이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된 사람이다. 진리와 하나 된 사람은 우주와 하나 된 사람이고, 우주와 하나이니 곳곳마다 내 마음과 똑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내 마음이 곧 진리이니까. 이와 같이 진리로써 분신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부처님과 하나 되어 부처님의 분신이며, 부처님의 마음을 이루어 성불한 사람이다. 물질세계에 대한 모든 번뇌를 이긴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우주 어느 곳에나 필요한 때에 나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널리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발원합니다.’ 여래 십대 발원문 중 앞의 아홉 가지는 마지막 광도제중생(廣度諸衆生)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라 생각된다. 널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면 닦아야 할 과정들이다. 이것이 곧 대승불교의 보살도인 동시에 모든 불자(佛子)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들이 성불해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다른 종교에서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교리와 다른 점이다.

 

현대사회는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살면서도 불만이 많고 스트레스에 싸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급변하는 현시대상항에 자기를 적응시켜가기가 점점 어려워져가기 때문이다. 불자들은 이들의 마음 가운데 진리의 등불을 밝혀주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고 때론 이기심도 필요하지만 전체의 균형을 깨가면서 자유를 찾고 이기심을 내세우면 부작용이 크게 생기는 법이고, 이 부작용은 전체의 이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이익과도 상반되는 법이니, 전체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범위에서 개인의 자유를 누리고 건전한 이기심을 발휘하면 개인의 이익이 곧 전체의 이익이 되고 전체의 이익이 곧 개인의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진리이다. 이 진리의 등불을 부처님께서 연기법이라 하셨다. 아무리 물질만능시대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 것도 없으니 언젠가는 물질만능시대가 다른 시대로 바뀌게 되고 나도 바뀌게 되어 있으니 물질에 집착할 것도 없고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도 할 것이 없다. 집착을 버리면 대 자유를 얻고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 영원히 불변하는 진여(眞如)의 세계에 안주하게 된다. 이것이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의 등불이다.

 

이 등불이야 말로 광도제중생(廣度諸衆生)하는 진리의 등불이니 병든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이 시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모든 불자(佛子)들은 이 진리의 등불을 들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실로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은 이상의 십대발원에 의해 부처를 이루었고, 우리 또한 성불하고자 한다면 이 열 가지 대원을 발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의 행복과 향상을 위해서도 이 대원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상에서 보듯이 『천수경』의 내용은 소원과 원력 기도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진언이나 다라니의 구절에는 원력을 성취시킬 만한 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래의 열 가지 큰 발원문

삼악도를 영원히 벗어나기 원합니다

탐진치를 신속히 끊어내기 원합니다

불법승의 말씀을 항상듣기 원합니다

계정혜를 부단히 닦아가기 원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늘배우기 원합니다

보리심에 항-상 머물기를 원합니다

안양국에 결정코 태어나기 원합니다

아미타불 신속히 만나뵙기 원합니다

곳곳마다 나투어 불법펴기 원합니다

모든중생 기어코 제도하기 원합니다

 

 

 

  제7장 사홍서원과 삼귀의

 

천수경에서는 여래의 원을 본받게 하고자 여래십대발원문을 외우도록 한 데 이어 중생 스스로가 발하는 네 가지 큰 서원, 곧 사홍서원을 발하고 있다. 이 서원은 맹세의 원이다.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중생 가없지만 기어코 건지리다.

번뇌 끝없지만 기어코 끊으리다.

법문 한없지만 기어코 배우리다.

불도 끝없지만 기어코 이루리다.

내맘의 중생을 기어코 건지리다.

내맘의 번뇌를 기어코 끊으리다.

내맘의 법문을 기어코 배우리다.

내맘의 불도를 기어코 이루리다.

 

이 네 가지 큰 서원은 제불보살님께서 세우시고 펴신 대원이며, 동시에 우리 불자들이 배우고 세우고 이룩해야할 큰 원이다. 법회를 할 때 ‘삼귀의’로 시작을 열고, ‘사홍서원’으로 온 법계에 원을 가득 채운 다음 끝을 맺는다. 왜 이렇게 하는가?

 

원력이 생명력이요 삶의 근본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사홍서원의 정신을 마음에 담아야 한다. 정녕 원(願)이 무엇인가? 마음가짐이다. 자기의 현재 좌표를 확연히 인지하고 미래세와 통하는 희망을 세우는 것이다. 비록 그 원이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여 꾸준히 나아가면 그 원에 힘이 생겨 원력(願力)이 되고, 그 원 속에서 마음을 넉넉하게 쓰면 행복이 스스로 깃들게 된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 가없지만 기어코 건지리다.

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현재도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서원이다. 괴롭고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을 만나면 위로해 주고, 병든 이에게 문병가 위로해 주며, 삶의 길을 잃은 사람에게 길을 찾아 주려고 노력하고, 가난한 이에게 바르게 살면서 가난을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주며, 화를 잘 내는 사람에게 화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주고, 각자의 자성에 누구보다 재미있고 멋있게 잘 살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음을 가르쳐주고, 이 『천수경』 안에 있는 쉽고 간단한 진언을 외우게 한다든지,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의 한 구절만이라도 외우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편안해지고 건강해질 것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이 모두 가없는 중생을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들의 어려움에서 건지는 작업이 될 것이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 끝없지만 기어코 끊으리다.

번뇌(煩惱)는 나를 괴롭게 하고, 답답하게 하고, 번거롭게 하고, 안절부절하게 하며, 심하면 속병을 앓게 하는 원인이다. 이러한 번뇌는 과거에 내가 경험한 일들이 내 마음에 저장되어 있다가 유사한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든지 생기고 있을 때 일어나는 심적인 작용이다. 번뇌는 집중하는데 장애를 일으켜 문제를 해결할 지혜가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사수관(死隨觀)이나 염불, 독경 혹은 봉사활동을 하여 번뇌의 원인을 찾아 제거할 수 있다. 번뇌 하나 하나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고 말겠다는 굳은 신심(信心)과 기도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번뇌를 신중히 참된 마음으로 찾아 갈 수 있다. 이렇게 어렵게 찾은 번뇌를 제거함에 따라 집중력이 길러지고 집중력이 길러짐에 따라 지혜가 일어나 사리를 바르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불자(佛子)님들이 사수관(死隨觀), 염불, 독경, 봉사활동 등을 통해 번뇌를 제거하는 노력을 매일 꾸준하게 하겠다는 서원이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 한없지만 기어코 배우리다.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종류의 중생이 있고, 중생 각자마다 가지고 있는 고통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 각자에게 맞는 법을 설하시다보니 무량한 법문이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경전에도 병의 실체, 병의 원인, 병을 다스리는 법, 병이 다 나았을 때 이르는 경지에 대한 진리를 설하고 있음으로 표현과 설명하는 방법이 그 대상에 따라 다르다고 하더라도 실제 내용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전이든 한 경전에 담겨진 진리라도 바르게 이해하고 이해한 대로 바르게 행하려고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심오한 진리에 이르게 되면 부처님의 무량한 법문을 다 배운 것과 같이 될 것이다. 무량한 법문이라 하더라도 내용에 있어 병의 실체, 병의 원인, 병을 다스리는 법, 병이 다 나았을 때 이르는 경지의 진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자(佛子)님들은 『천수경』이나 『반야심경』이나 어떠한 경전이든 하나를 택하여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이해한 대로 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 날 진리가 가슴에 와 닿는 때가 올 것이다. 이렇게 얻은 진리는 바로 무량한 법문에 담겨 있는 진리와 같은 진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 끝없지만 기어코 이루리다.

앞의 세 가지 서원은 이 불도(佛道)를 이루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위없이 높은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에 인도에는 브라만 종교가 있었다. 이 종교에서는 창조주가 있고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이 있었다. 피조물이란 사람을 포함한 삼라만상이다.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와 대등할 수 없고 창조주의 구원에 의하여야만 다음 생에 금생보다 나은 신분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하여 창조주의 구원을 청하게 했다. 이러한 구원의 개념은 창조주와 구원을 받을 사람 사이에 이들을 중재하는 브라만 족이라는 사람들이 있어 중재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구실로 구원을 받을 사람을 오히려 착취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천민들의 고통은 더욱 심해가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우주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부처가 되는 길로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가 되는 길을 여셨다. 즉 창조주도 없고 피조물도 없다는 진리와 하나 되는 길을 여시고, 자신을 승화하면 이 진리와 하나 되어 스스로 창조주가 된다고 하셨다. 이와 같이 다른 종교에는 없는 길이 불교에는 있기 때문에 불도무상(佛道無上), 위없이 높은 불도라 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마음 가운데 어떠한 신(神)에게도 지배 받을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을 가진 창조주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자기 인생을 창조해 가는 창조주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창조주임을 깨닫고 창조주답게 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이 항상 계시고 우리 각자가 곧 부처님이라는 가르침은 참으로 위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는 대부분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그들의 창조주로부터 해방되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불도(佛道)를 닦아 부처님과 하나 되고 광대무변한 우주의 진리와 하나 되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우주가 안겨오는 길을 닦는다. 불도(佛道)로서 우리는 참선, 염불, 독경, 불공, 보시활동 등을 한다. 이것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근본으로 하는 수행이고, 육바라밀은 팔정도(八正道)를 근본으로 하는 수행이다.

이와 같이 무상(無上)한 불도(佛道)이기에 ‘부처님을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이라 했지 피조물을 창조하는 창조주라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무상한 부처님이 되는 길을 닦기 위해 우리는 매일 잊지 않고 기도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불공올리고 염불하고 참선하고 보시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부처가 되는 길의 과정들이다.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度)

자성번뇌서원단(自性煩惱誓願斷)

자성법문서원학(自性法門誓願學)

자성불도서원성(自性佛道誓願成)

 

『천수경』의 ‘발사홍서원’은 다시 안으로 향하여 자성 속에 있는 중생, 번뇌, 법문, 그리고 불도를 설한다.

자성 속의 중생이란 눈에 보이는 생명체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생각’을 말한다. 즉 홀연히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번뇌 망상이 ‘나’ 속의 중생이다. 그러므로 자성번뇌서원단이 되면 자성중생서원도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자성번뇌서원단을 하는 방법은 자성 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백색 광명을 발현시키면 흑색의 번뇌는 저절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자성자리를 찾는 참선, 기도, 염불, 간경, 불공, 보시활동 등의 수행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맑게, 그리고 밝혀가게 되면, 그것이 곧 자성불도서원성으로 자성의 불도를 저절로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번뇌를 끊고 ‘나’를 제도하기 위해서는 틈나는 대로 법문을 듣고 그 법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잘 안되는 참선이요 염불일지라도 하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가운데 진전이 있는 것이다.

 

발원이귀명례삼보(發願已歸命禮三寶)

 

이제 『천수경』은 발원을 마치고 삼보에 대한 귀명례를 하며 끝을 맺는다.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

나무상주시방법(南無常住十方法)

나무상주시방승(南無常住十方僧)

 

발원이 귀명례삼보

시방에 항상계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시방에 항상계신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시방에 항상계신 스님들께 귀의합니다(3)

 

발원이귀명례삼보(發願已歸命禮三寶)의 발원이(發願已)란 발원을 마치고의 뜻이니 사홍서원을 마쳤다는 말이다. 귀명례삼보(歸命禮三寶)란 불법승 삼보님께 내 몸과 마음 다 바쳐 예배드립니다라는 뜻이다. 사홍서원은 마쳤지만 그 서원을 성취하고 우리의 원력 달성을 위해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스님들께 귀의함으로서 항상 삼보님과 하나 되어 위신력을 입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는 결의이다.

 

나무(南無)란 몸과 마음 다 바쳐 예경합니다라는 말인데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와 같은 의미이다. 상주(常住)란 시간적으로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고, 시방(十方)이란 공간적으로 언제 어디에서나의 의미이다. 상주시방불(常住十方佛)란 부처님께서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고, 나무상주시방불(南無常住十方佛)은 언제 어디에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부처님께 이 몸과 마음 다 바쳐 예경합니다, 혹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합니다이다.

 

언제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계시는 부처님이 되면 이 세상의 삼라만상 모두를 부처님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되어 섬기게 된다. 모두를 부처님으로 섬기게 되는 것은 시방세계 일체를 부처님의 화현이고 진리의 시현이라 우리를 깨우쳐 주고자 나투신 스승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람소리, 물소리, 중생의 하소연 등, 모든 것이 다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는 부처님이요 법문이요 스승의 화현이다. 이렇게 되면 이 법계와 ‘나’는 이미 둘이 아니게 되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나’의 실천이 그대로 하나가 된다.

 

정녕 시방에 상주하고 있는 불법승에 귀의하는 것은 ‘나’와 법계가 하나 되는 일이다. ‘나’와 법계가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나는 부처님의 화현이 되고 관세음보살의 분신이 된다.

 

부디 잊지 마십시오. 밖으로 내딛는 실천의 한 걸음이 내 마음의 고향을 향한 귀한 한 걸음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 어디에나 계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정삼업진언(淨三業眞言)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옴 사바바바 수다살바 달마 사바바바 수도함

 

정삼업진언은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깨끗이 하는 진언이다.

옴: 진언의 왕, 소리의 근원, 우주의 핵심, 섭복 / 사바바바: 본성(本性) / 수다: 청정(淸淨) / 살바: 일체 / 달마: 법(法) / 수도: 수다와 같음, 청정 / 함: 자기 자신 /

모두 합치면: 옴! 본성이 청정한 일체법이여, 내 본성도 청정하게 하여 지이다.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법은 본성이 원래 청정하고 훌륭한 것이므로 자신 또한 이 법과 더불어 청정하게 되어질 것을 기원하는 진언이다. 자성이 청정해지면 신구의(身口意) 삼업 중 의업(意業)이 청정해지는 것이니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은 의업에 따라 저절로 청정해진다.

 

개단진언(開壇眞言)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사야 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사야 훔

옴 바아라 놔로 다가다야 삼마야 바라베사야 훔

 

개단진언은 제단을 여는 진언이다.

바아라: 금강(金剛) / 놔로: 문(門) / 다가다야: 열다 / 삼마야: 삼매 / 바라베사야: 두루 들어가다 / 훔: 이구청정(離垢淸淨) /

모두 연결하면, 옴! 금강의 문이여 열려지이다. 삼매에 두루 들어가 모든 때를 씻어내 청정하게 하리라.

지혜의 문을 열어 법계와 하나 되는 삼매에 두루 들어가 일체 더러운 것을 정화하여 청정하게 하고자 하는 진언이다.

 

법요식을 위해 『천수경』을 독송하는 동안에 우리들의 삼업(三業)이 청정하여 지고, 삼업이 청정하여 지면 지혜로운 마음이 불단, 지장단, 신중단, 영단의 문을 열어 단을 차례로 청정하게 한 후 부처님, 지장보살님, 신중님 및 영가님들을 차례로 안좌(安坐)하시게 하여 그들과 하나 되어 삼매에 들어가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부처님 세계와 완전히 하나 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라는 진언이다.

 

건단진언(建壇眞言)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옴 난다난다 나지나지 난다바리 사바하

 

건단진언은 ‘제단을 세우는 진언’으로 풀이해 보면,

난다: 환희의 신 / 나지: 건단 무녀신 / 난다바리: 희열의 낙원을 가지고 오다 / 사바하: 그렇게 이루게 하여 주소서 /

모두 합치면, ‘환희신이여, 환희신이여, 단을 세우는 무녀신이여, 단을 세우는 무녀신이여, 희열의 낙원을 펼쳐 주소서, 모든 일이 이와 같이 성취되게 하소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부처님과 완전히 하나 된 새로운 세계에서 제단을 건립하여 환희신이 희열의 낙원을 이루어 모든 일이 성취되게 하여 줄 것을 기원하는 진언이다.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여피계명주(如彼髻明珠)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 무량중죄제(無量重罪除)

일체촉예처(一切觸穢處)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3번)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정법계진언은 앞에서 한번 나온 것으로 반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라자색선백(羅字色鮮白)의 라자(羅字)는 “옴 람” 중 람의 ‘라’이다. ‘<라(羅)>의 글자는 색이 곱고 흰데, 공점이엄지(空點以嚴之) 공에 점으로 장엄했다인데 둥근 점으로 장엄했다고 해석한다.

‘옴 람’이라고 입으로 발성하는 소리의 파장은 우주의 근본 파장과 같은 cycle이므로 우주의 진여(眞如)와 마음의 진여가 만나 즉시 하나로 합쳐지는 삼매에 들 수 있는 소리이다. 이러한 뜻을 가진 ‘옴 람’이란 소리를 ‘라(羅)’라는 글자로 색이 선명하고 희게 보이게 했다는 뜻이다.

 

이 ‘옴 람’의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 중에 원음(圓音)에 속하는 것으로, 부처님께서 원음으로 말씀하시면 어떠한 말을 상용어로 쓰는 사람이나, 어떠한 소리로 의사소통을 하는 중생도 언어의 형상을 초월하여 다 알아 듣고 환희심을 내고 깨달음을 얻은 중생도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은 뜻을 가진 부처님의 원음인 ‘옴 람’을 외워 공(空)한 마음에 점(點)으로 장엄한 것과 같다는 말씀이다. ‘옴 람’을 외울 때마다 태허같이 빈 마음에 ‘옴 람’이란 화대의 종자가 심어진다고 생각하면 그 종자가 공한 가운데 점으로 장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한 점을 이해하기 쉽지 않음으로 여기에서 ‘둥근 점’이라 했다.

그리고 ‘람’은 화대(火大)의 종자로 모든 번뇌 망상을 소멸하고 청정한 지혜를 솟게 하는 종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피계명주(如彼髻明珠) 치지어정상(置之於頂上)

‘람’의 공한 점을 마치 상투를 밝은 구슬로 장식하는 계명주(髻明珠)와 같이 가장 높은 정상(頂上)에 안치(安置)하여 받들 것이니라. 라는 뜻이다.

소리를 잡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마음속에 새겨진 점을 머리보다도 더 높은 상투를 밝은 구슬로 장식하듯이 가장 귀중하게 모시고 받들려고 하는 마음에 공덕이 있고 복이 온다는 의미이다.

 

진언동법계(眞言同法界) 무량중죄제(無量重罪除)

진언은 법계와 같아서 무량한 중죄를 모두 제거한다.

‘옴 람’이란 진언(眞言)의 ‘옴’은 우주의 핵심이고, ‘람’은 화대(火大)의 종자로 모든 번뇌 망상뿐만이 아니라 일체 중한 죄업을 소멸하고 청정한 지혜를 샘솟게 하는 종자이니 내 마음이 청정해지면 법계와 하나가 된다는 진언이다.

 

일체촉예처(一切觸穢處) 당가차자문(當加此字門)

촉(觸)은 닿다, 부딪치다의 뜻이고, 예처(穢處)는 더러운 곳이니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가(加)는 더하다, 입다, 몸에 붙이다의 뜻이 있으니 두 구절을 합하면 일체 괴로운 일에 부딪쳤을 때 응당 이 글자(옴 람)를 그 곳의 문에 붙이라고 했으니 ‘옴 람’을 외우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려움이 있을 때 반드시 ‘옴 람’을 외우면 관세음보살님이나 신장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

 

끝으로 「나무 사만다 못다남 남」의 <남>은 보리문(菩提門)인 ‘불(火)의 종자’라는 뜻이다. ‘널리 두루 계시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에게 귀의하여 받드오니 일체 더러운 것을 화대(火大)의 종자로 녹여버리고 깨달음의 길로 가게 하여 주소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천수경』의 결론은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어둠과 두려움과 부정적인 것들이 모두 사라져 늘 기쁨과 희망, 안녕과 행복, 그리고 평화가 깃들어지도록 함에 있다. 단순히 경전을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 속에 숨은 뜻이 우리의 인생사 속에서 하나가 되어 삶에 유익한 보탬이 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대비주(大悲呪) 기도를 하여 『천수경』이 담고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스런 경지와 일체(一體)가 되도록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문(方便門)이 열리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천수경』을 통해서 관세음보살님의 자비를 바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천수경』을 공부한 이 인연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관세음보살님의 자비가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불국토가 되기를 기원한다.

모두 함께 성불합시다.

2549년 12월 1일

강사: 현성(玄性)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