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 1 부처님의 생애 불교는 말 그대로 "부처님(佛)의 가르침(敎)"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곧 불타(佛陀, Buddha) 즉, 깨달은 사람(覺者)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질과 성품이 있는데, 이를 불성(佛性)이라 한다. 저마다 불성을 간직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첫째, 부처님의 생애를 알고 그 삶대로 사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는 한 인간이 진리를 깨쳐 부처님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가 불자로서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은 바로 부처님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생애를 배우는 것은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그 교조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부처님이 된 삶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부터 우리도 부처님 같이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 불교를 믿고 행한다는 것은 결국 ꡐ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ꡑ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 같이 살고 싶은 이에게 부처님의 생애는 다시 없는 인생의 귀중한 나침판이다.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약2, 600여년 전, 인도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카필라(Kapila)국 사캬(Sakya, 釋迦)족의 정반왕과 왕비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났다. 성은 고타마(Gotama, 최상의 소라는 뜻)였고, 출가하기 전 이름은 싯달타(Siddh rtha)였다.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석가모니(Sakyamuni) 즉,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고 불렀다. 발심과 서원 - 깨달음의 씨앗을 뿌리다 지금으로부터 한량없는 오랜 세월 전에 수메다(善慧)라는 한 수행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7대조부터 내려오는 막대한 재산을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보시한 후 출가하여 히말라야에 들어가 수행자가 되었다. 그때 연등(燃燈)이라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셨다. 수도인 디파바티(Dipavati)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연등부처님을 공양하고자 온갖 향과 꽃, 훌륭한 음식을 준비하고 연등부처님을 기다렸다. 마침 공양물을 구하기 위해 그곳에 들른 수행자 수메다는 연등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말을 듣자 기쁜 마음이 치솟았다. ꡐ나는 여기에 깨달음의 씨앗을 뿌려야겠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ꡑ 이렇게 생각한 수메다는 부처님께 공양을 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도시에는 왕의 지시로 모든 공양물이 부처님께 바쳐져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수메다는 아름다운 꽃 일곱 송이를 들고 가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가서 그 꽃을 팔 것을 간청했다. 그녀는 팔지않을 마음으로 이 꽃 한 송이는 은1백냥이며, 또한 나와 결혼을 약속한다면 이 꽃을 팔겠다고 했다. 수메다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결국 그 꽃을 부처님께 바칠 숭고한 마음으로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녀는 수행자의 진지한 마음에 감탄하여 나머지 두 송이 꽃마저 부처님께 공양하라고 주었다. 수메다는 그 꽃을 연등부처님께 바쳤다. 연등부처님께서는 뭇 중생을 가르치고, 젊은 구도자 수메다에게 기쁨을 주기위해 대중이 바친 꽃을 허공에 떠있게 하는 기적을 보이셨다. 마침 연등부처님과 제자들이 지나는 길에 진흙웅덩이가 있었다. 수메다는 부처님께서 발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위해 진흙 위에 머리를 풀고 엎드렸다. 진흙 바닥에 엎드린 채 그는 다짐했다. "아 ! 나도 언젠가는 지금의 세존(世尊)이신 연등부처님 같이 완전한 인격자가 되어 지기를 세존이신 연등부처님께서 지금 하셨듯이, 나도 이 최고 법의 수레(法輪)를 돌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 오직 세상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많은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할 수 있고 또한 무수한 생명들의 이익과 행복이 될 수 있는 연등부처님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소서." 이 광경을 본 연등부처님은 제자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견디기 힘든 고행을 하고 있는 이 수행자를 보라. 그는 지금으로부터 무량한 겁이 지난 후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될 것이니라." 견줄 사람 없는 대성인의 말씀을 듣고 천인과 인간들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수행자 수메다는 분명 부처님이 될 씨앗이요, 부처님이 될 싹이로다." 모든 이가 지나간 뒤 엎드려 있던 수메다는 몸을 일으켜 앉아 스스로 생각했다. "내가 지금껏 쌓아온 수행을 생각해 보자" 그때1만 큰 세계가 크게 진동하였고 그 진동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연등부처님은 현자 수메다가 부처님이 되기 위한 근본적인 덕목을 모두 깊이 사유하고 있는 까닭에 이 대지와1만 큰 세계가 진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연유를 말씀해 주셨다. 이때1만 큰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기필코 부처님이 되실 것이옵니다. 흔들림 없이 정진하여 주소서. 멈추시거나 물러 나서는 안되나이다. 저희들도 또한 당신이 기필코 깨닫게 될 것임을 잘 알고있나이다." 수메다는 모든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의 근본적인 덕목인 10바라밀의 수행을 남김없이 생각해 낸 후10만 아승지겁을 지내면서 10바라밀의 수행을 닦아 스물 네 분의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이름은 호명 보살이었다. 제1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도솔천에 계시다. 호명보살이 10바라밀 수행을 닦고 도솔천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모든 하늘 세계의 천인들이 보살의 처소에 모여 들었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당신이 10바라밀을 행 하심은 제석천이나 마왕, 범천, 전륜왕의 영광을 위해 이룬 것이 아니옵고, 오직 세상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일체자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신 것이나이다. 스승이시여, 바야흐로 부처님이 되기 위한 때가 왔나이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부처님이 될 때이나이다." 호명보살은 천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때와 지방, 가계와 생모에 대해 살핀 뒤 석가족의 마을에 있는 마야부인의 태중에 드시리라 결정하셨다. 그리고 나서 호명보살은 바로 깊은 선정 속에서 마야부인의 태에 들었다. 정반왕과 결혼한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던 마야부인은 그 때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자를 잉태하였다. 제2비람강생상( 藍降生相) - 세상에 태어나시다 모든 백성의 기대 속에 따스한 봄이 되고 왕비의 산달이 다가왔다. 마야부인은 해산일이 다가오자 인도의 관습에 따라 친정인 데바다하로 향하였다. 친정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 동산에 이르렀다. 동산에는 아름다운 사라나무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왕비는 상서로운 사라나무 숲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꽃으로 가득한 숲길을 거닐었다. 왕비가 아름다운 사라나무 가지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갑자기 산기를 느꼈다. 일행은 급히 처소를 마련하였으나 그녀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선 채로 아무런 고통 없이 아들을 낳았다. 부처님은 태어나자 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토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다 고통 속에 잠겨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태자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나 오색의 감로수로 태자의 몸을 씻어 주었다. 땅이 은은히 진동하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꽃 비가 내리고 천신들이 내려와 차례로 예배 드리며 이 세상 가장 존귀한 분의 탄생을 축복하였다. 태자가 태어난 지 닷새가 되자 히말라야로부터 아시타 선인이 내려와 태자를 뵙고자 했다. 태자의 얼굴을 본 아시타는 슬피 우는 것이었다. 불길하게 생각한 정반왕이 연유를 묻자 아시타 선인은 대답하길 ꡐ왕자는 출가하면 부처님이 될 것이오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이 될 것인데, 자신이 늙어 부처님의 출현을 뵐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것ꡑ이라 했다. 한편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싯달타가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나니 태자는 이모를 새어머니로 하여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 따라 아들이 출가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반왕은 태자가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호화스러운 궁전을 지어 향락 속에 자라게 하였다. 제3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세상을 두루 살피다 싯달타 태자는 왕궁의 풍요 속에서 성장한다. 7세가 되자 태자는 학문과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여 곧 모든 학문과 무예에 통달하여 더 이상 그를 가르칠 만한 스승이 없게 되었다. 아버지 정반왕은 그를 극진히 생각하여, 계절에 따라 생활하도록 궁전(三時殿)을 세 곳이나 지어주는 등 온갖 호사 속에 성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도성 밖 출입만은 언제나 금지시켰다. 태자가 현실세계의 고통을 모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12세 되던 어느 봄날 태자는 부왕과 함께 농경제의 파종식에 참가하였다. 그 때 태자는 들에서 농경제에 참가한 농부들의 마르고 고단한 모습과 쟁기를 끄는 소들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다. 또한 쟁기가 지나간 뒤 뒤집혀진 흙 사이로 나온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 날아든 새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는다.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세상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이에 싯달타는 염부나무 밑에서 그 고통의 해결을 찾기 위한 깊은 명상에 잠겼다. 이때 태자는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한다. 태자가 자비심으로 세상을 고통 속에서 구원할 길을 찾아 선정에 들어 있을 때, 이를 지켜 본 정반왕은 오히려 태자를 세상과 더욱 멀어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세상에 대한 고뇌는 더욱 깊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태자는 삶의 생생한 실상과 마주친다. 성년이 된 어느 봄날 태자는 부왕 몰래 성문 밖을 나선다. 그리고 동문, 남문, 서문에서 각각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을 보게 된다. 생명을 가진 어떤 것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번민하던 싯달타가 북문에서 만난 사람은 바로 출가수행자 였다. 그리고 싯달타는 출가수행만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을 사문유관이라고 한다. 태자가 네 곳의 성문에 나가 세상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왕궁의 영화와 권세, 향락과 사치 그리고 어떤 학문과 종교에서도 생로병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했던 태자는 출가수행자에게 그 길을 찾았던 것이다. 제4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출가하시다. 나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많은 중생이 삶과 죽음의 고통 속에 있지 아니한가. 나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집을 나가는 것이니 위 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 <<오분율>> 수행자를 만난 후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싯달타 태자는 모든 사람이 잠든 밤에 백마를 타고 왕궁을 떠난다. 왕위의 자리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라훌라 마저 뒤로 한 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 이날이 태자의 나이 29세 되던 해 음력2월8일이었다. 애마 칸타카를 타고 마부 챤나를 따라 성을 나온 싯달타는 보검을 빼 들고 스스로 머리와 수염을 깎은 뒤, 과거의 모든 부처님 앞에 일체의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깨닫겠다고 굳게 서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비단옷을 거지의 누더기와 바꿔 입었다. 이렇게 하여 출가수행자가 된 싯달타는 남쪽의 신흥 국가인 마가다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훌륭한 종교가들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던 알라라 칼라마의 문하에서 그가 가르치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라는 수행을 배웠는데 곧 스승의 경지에 도달해 버렸다. 다시 그는 다른 스승인 웃다카 라마풋타에게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을 배웠다. 하지만 그 경지 역시 곧 도달해 버렸다. 싯달타는 스승에게 배운 선정을 통해서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 곁을 떠나 독자적인 수행을 시작하였다. 제5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시다. 여러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곧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여 더 이상 그를 가르칠 이가 없었을 때, 싯달타는 당시 다른 수행자들이 그러했듯이 고행의 길로 들어섰다. 싯달타의 고행은 실로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다. 부처님의 일생을 찬탄한 <<불소행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실로 고행자 중에 최상의 고행자였다. 남들이 바치는 음식도 받지 않았으며 풀과 떨어진 과일만 주워 먹었다. 나는 무덤 사이에서 시체와 해골과 함께 지냈다. 그때 목동들은 내게 와서 침을 뱉고 오줌을 누기도 했으며 귀에 나무 꼬챙이를 쑤셔 넣기도 했다. 내 목에는 여러 해 동안 때가 끼어 저절로 살 가죽을 이루었으며 머리는 길어 새들이 찾아 들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더한 고독한 고행자였다. 나는 숲에서 숲으로, 밀림에서 밀림으로, 낮은 땅에서 낮은 땅으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홀로 지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는 고행자였다. 나아가거나 물러 서거나 조심하여 한 방울의 물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그 가운데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 일지라도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를 대추 한 알로도 보냈으며 멥쌀 한 알을 먹고도 지냈으며 하루에 한끼, 사흘에 한끼, 이윽고 이레에 한끼를 먹고 보름에 한끼를 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무척 수척해졌다. 내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았고 내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무너진 서까래 같았다. 내 뱃가죽은 등뼈에 들러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처박고 넘어졌다. 살갗은 오이가 말라 비틀어진 것 같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뽑혀 나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ꡐ아 싯달타 태자는 이미 목숨을 마쳤구나, 이제 곧 목숨을 다할 것이다ꡑ라고.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고행을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의 어떤 수행자도, 미래의 어떤 수행자도 자신과 같은 고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실만큼 고행에 몰입하였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고행을 함으로써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생활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행을 한 사람은 모종의 신비하고도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6년에 걸친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었고,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고행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이때 싯달타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수행자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하나는 관능이 이끄는 대로 애욕에 탐닉하여 욕망과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찬탄하는 것이며, 수행자의 숭고한 목적에 무익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괴롭히는 것에 열중하여 고행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으로 수행자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모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찾았다. 중도는 곧 양 극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결코 양 극단을 적당히 절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 ꡐ중이란 곧 바름이다(中者正也)ꡑ라고 하였듯이 중도란 곧 정도(正道)의 다른 말이다. 쾌락과 고행의 가운데가 아니라 진실로 바른 길을 뜻한다. 따라서 고행의 포기는 출가 수행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나 관습까지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수행자들로부터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다섯 사람은 부처님을 타락하였다고 비난하며 떠났다. 그러나 부처님은 주저 없이 고행을 포기했다. 이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생애에는 위대한 포기가 몇 번이나 있다.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왕위를 포기했고, 행복과 안락이 보장된 가정을 떠났으며, 모두가 믿는 당시 최고의 사상을 포기했다. 최고의 고행자라는 명예도 포기했다. 이것은 세상 전부가 자신을 외면할 지라도 참된 것이라면 주저 없이 결 단정을 내리는 참된 수행자의 길을 보여준 것이다. 제6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마왕을 항복 시키시다. 수행자 싯달타는 고행을 포기한 뒤 수자타가 올리는 우유 죽 공양을 받아 기운을 회복하고 목동 스바스티카(吉祥)가 바친 부드럽고 향기로운 풀을 보리수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앉아서 굳은 다짐을 하였다고 한다. 내 여기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내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 <<수행본기경>> 금강석보다 굳센 의지 때문인지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깨달으셨고, 깨달으신 그 자리는 훗날 금강보좌(金剛寶座)라 부른다. 바야흐로 싯달타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으려 하자 가장 다급해진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중생을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마왕 파순이었다. 마왕 파순은, ꡒ사문 고타마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려 한다. 그가 깨달음을 성취하면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그 깨달음의 경지는 나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가 깨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ꡓ 라 생각하여 먼저 자신의 세 딸을 보내 고타마를 유혹하도록 하였다. 마왕의 세 딸은 온갖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고타마는 수미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몸은 비록 아름 답지만 모든 악이 가득해 견고하지 않고 부정이 흘러 생로병사가 항상 따른다. 손에는 팔찌, 귀에는 귀고리를 흔들면서 교태 섞인 웃음으로 탐욕의 화살을 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대들의 욕망을 독약으로 안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하게 하고 사악한 욕정은 독사의 머리와 같으니 내 이미 모든 유혹을 뛰어 넘었다. 너희들은 모두 본래 모습을 들어내고 물러가거라. 이렇게 말하자 마왕의 세 딸들은 모두 추한 노파로 변해 탄식하며 물러갔다. 그러자 마왕은 화가 나서 수행자 고타마를 향해 태풍, 폭우를 보내고 창칼, 불화살, 돌을 던지며 악귀를 동원하여 수행을 방해했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그것은 모두 꽃으로 변하여 흩날릴 뿐이었다. 유혹과 폭력으로도 수행을 막지 못한 마왕은 직접 싯달타 앞에 나타나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석가족의 아들 고타마여! 그대는 속히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그대에게는 전륜성왕의 지위가 보장되어 있지 않는가? 이제 곧 가서 세간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어 그들을 지배하고 오감의 쾌락이 주는 미묘한 맛을 마음껏 즐기라. 석가족의 아들이여! 그대가 추구하는 도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피로만 더할 뿐임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그렇게 회유하자 수행자 고타마는 마왕을 향해 다음과 같은 준엄한 사자후를 한다. 게으른 자의 무리여, 사악한 자여, 그대가 여기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대가 말하는 그 좋은 공덕이란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런 것은 그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 주어라. 나는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어떤 욕망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보라, 내 존재의 이 순수를. 그대의 제1군대는 욕망이며 제2군대는 혐오이며 제3군대는 기갈이며 제4군대는 집착이다. 그리고 그대의 제5군대는 피로와 수면이며 제6군대는 공포심이요 제7군대는 의혹이며 제8군대는 위선과 고집, 그리고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익과 명성이며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전 병력이며 검은 마군이다. 그러므로 용감한 자가 아니면 너를 이겨낼 수 없으리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그대의 공격을 이렇게 잘 막아내고 있다. 악마여, 사람들도 저 신들 마저도 그대의 군대를 격파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지혜의 힘으로 그대의 군대를 쳐부수리라. 굽지 않은 질그릇을 돌로 쳐 깨뜨리듯이 << 숫타니파타>> 그리고 부처님은 머나먼 과거세부터 한량없는 세월 선근공덕을 쌓아왔기에 악마의 군대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마왕 파순은 그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외쳤다. 수행자 고타마는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가리키며 ꡐ이 땅은 능히 일체의 물건을 내어 차별이 없이 평등한 행을 하도다. 원컨대 지금 진실을 말하라ꡑ고 했다. 이때 땅을 지키고 있던 지신(地神)이 ꡐ가장 큰 대장부시여, 내 당신을 증명하리다. 제가 아나이다ꡑ라고 외치자 대지와 삼천대천세계의 국토는 두루 크게 진동하였다. 마왕은 이 우렁찬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수행자 고타마는 마왕의 항복을 받고 아무런 방해도 없이 깊은 선정에 들었다. 일반적으로 절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불상을 보면 왼손은 가부좌한 발 위에 올려놓고 오른 손은 무릎 위에서 아래로 땅을 향하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항복 받으신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제 수행자 고타마에게 어떤 장애도 없게 되었다. 깨달음을 끝까지 가로막고 있던 악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모든 구속이 사라진 수행자 앞에 세상의 이치가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그 이치는 ꡐ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ꡑ 라는 연기(緣起)의 진리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바로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한편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해한 악마들의 면면을 다시 살펴보면, 이들이 수행자 고타마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세간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듯하다. 끝까지 그를 붙들고 있던 욕망 가운데 가장 먼저 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육체의 욕망 즉, 색욕이었다. 이 세 딸의 이름이 첫째는 은애(恩愛), 둘째는 상락(常樂), 셋째는 대락(大樂)이라는 것을 보아도 성적 쾌락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마왕의 공격은 마왕의 여덟 가지 군대라고 표현된 욕망, 혐오, 기갈, 집착 등 마음 속의 온갖 번뇌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왕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은 전륜성왕의 자리였다. 이것은 곧 권력욕을 뜻한다. 이것은 색욕과 공포 보다도 더 질기고 뿌리가 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권력욕은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을 파멸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한 국가와 민족,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욕망이다. 부처님은 마왕의 항복을 받은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에선 무기를 써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나 나는 중생을 평등하게 여기는 까닭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평등한 행과 인자한 마음으로 악마를 물리쳤나니 <<수행본기경>> 결국 이 세 가지 욕망을 극복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육체적, 정신적, 제도적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마왕의 온갖 유혹과 물리적 위협을 극복하는 이 장면은 우리가 가져야 할 불퇴전의 수행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성도(成道)란 불도를 완성했다는 뜻으로 곧 수행자 싯달타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 것을 말한다. 이때가 부처님이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8일이었다. 이날은 사실상 불교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며 불교에서는 성도절(成道節)이라 하여 뜻 깊은 날로 삼고 있다. 성도절은 수많은 마왕의 군대를 항복 받고 깨달은 날이며, 인간이 몸으로 신의 세계를 뛰어 넘어 대자유인의 시대를 연 날이다. 부처님은 우리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셨다. 온갖 번뇌와 고통의 수렁에서 허덕이는 중생들도 사실은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알려주신 것이다. 부처님의 성불 이후 새로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까지 인간은 고통과 혼돈, 무명 속에서 신과 제도와 욕망에 사로잡힌 포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성불하시므로 중생도 대자유, 대자재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제7녹원전법상( 鹿苑轉法相) - 진리를 설하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후 한동안 보리수 아래 머물며 삼매에 들어 있었다. 삼매에 든 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를 주저하셨다. 이 때 최고의 신인 범천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중생을 위해 설법해 주실 것을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고 한다. 당시 부처님의 심정은 전해진다. 고생 끝에 겨우 얻은 이것을 또 남들에게 어떻게 설해야 하는가?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 상응부경전>>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에게 진리를 깨우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로 한다. 범천의 간청에 따라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하고 이렇게 알린다. 감로(不死)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려라. 전도를 결심한 부처님은 깨달음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때 스승이었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라마풋타를 생각하였지만, 이미 그들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아시고, 전에 설산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를 찾아 녹야원으로 갔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하자 타락한 사문이라 비난한 이들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당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첫 대상으로 삼으셨다. 최초로 설한 것은 중도, 사성제, 팔정도의 가르침이었다. 설법과 대화, 토론을 통해 다섯 수행자 가운데 교진여가 맨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고 곧 나머지 수행자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니 최초의 비구였다. 그 뒤 부처님께서는 야사를 비롯한 60명의 젊은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각 지방으로 가서 진리의 가르침을 전할 것을 이렇게 권유하였다. 비구들이여,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을 설하라.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 부처님께서는 우루벨라로 가서 당시 가장 이름있는 종교가였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여 그들과 제자1, 000명을 제자로 받아 들였다. 왕사성 종교가를 모두 교화한 이 사건은 국왕과 백성을 놀라게 하였고, 국왕인 빔비사라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게 되었다. 특히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서 우기(雨期) 동안 머무시며 가르침을 펴실 수 있는 사원을 기증했으니 바로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10대 제자의 한 분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제자250인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과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왕사성의 죽림정사는 사위성의 기원정사(祇園精舍)와 함께 전도의 양대 거점이 되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지 몇 년 후에 고향인 카필라국에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교화하고 역시 10대 제자의 하나인 아난과 라훌라, 아니룻다, 우바리 등의 제자를 출가 시켰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뒤부터 입멸할 때까지 45년 동안 중인도 지방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수행자와 재가자, 귀족과 평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셨다.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깨달음에는 빈부귀천이 없기 때문이다. 제8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육신을 버리고 열반에 드시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신지 45년, 그 동안 부처님께서는 한시도 중생 속에서 동고동락하셨다. 그러나 80세가 되신 해에 부처님은 아난 존자에게 "나는 이미 모든 법을 설했고 내게 비밀은 없으며 육신은 이제 가죽 끈에 매여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낡은 수레와 같다"고 말씀하시고, "너희들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고 이르셨다. 이것이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전법의 길을 떠나시어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의심 나는 것이 있는가를 세 번이나 물으신 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모든 것이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가시니 이 날이 음력2월15일 열반절이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 na)에서 온 말로 ꡐ불어서 끈다ꡑ는 뜻이다. 무엇을 불어서 끄는 것인가? 바로 욕망과 번뇌의 불을 끄는 것이다. 지혜 제일이라 불리는 사리불은, 열반이란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 것이며,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바로 팔정도(八正道)라 하였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성도를 이루신 그 순간부터 이미 열반에 드신 것이다. 세상에 인연으로 생긴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따랐다. 원래 부처님은 업의 굴레에 매인 몸이 아니다. 깨달으신 부처님은 영원하여 태어난다거나 죽은 일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ꡐ나의 육신은 설사 죽더라도 제자들이 법과 계율을 잘 지키고 행하면 나의 법신(法身)은 영원히 상주하여 멸하지않으리라ꡑ 말씀하셨다. 결국 부처님의 생애는 누구든지 부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수행하면 성불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이신 길이다. 이는 모든 중생이 지닌 불성으로 가능하며 열반은 그 최고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다. 길에서 길로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 부처님은 단순히 이 세상에 한번 왔다 가신 분이 아니다. 모든 중생을 깨치고자 서원을 세우고 수억 겁을 거듭나며 수행을 닦은 분이다. 그러나 그 분의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만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 오늘을 사는 발심 수행자의 모습이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천상의 영화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그 분이 나신 곳은 호화찬란한 구중궁궐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길가의 동산 위였다. 그래서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가신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부처님의 탄생은 그 자체가 중생의 삶에서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불자는 중생을 위해 일생동안 헌신하셨던 부처님을 기리고 그 삶을 본받아야 한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쉼 없이 정진하는 것,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닮는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의 그늘진 곳,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 곳에 동참하여 대비수고(大悲受苦)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불자의 자세이다. 2 부처님의 깨달음 1 연기 - 불교의 세계관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으므로 <<자설경>> 싯달타 수행자는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연기(緣起)이다. 연기란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원인으로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태어남으로 저것이 태어난다.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중아함경>> 연기는 인과법, 인연법, 연생연멸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부처님은 이 연기의 법칙이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진리로서 변함없는 것으로,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요컨대 연기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아함부 경전에 ꡐ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님을 본다ꡑ고 하였는데 여기서 부처님은 연기를 법이나 부처님과 동일하게 간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질 때 소멸하며, 세상 모든 것은 변하여 영원한 것이 없으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연기의 이치를 깨쳐야 한다. 2 삼법인 - 존재의 실상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이다. 삼법인(三法印)이란 세 가지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도장 인(印)자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 어디서나 같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제 어디서나 같음을 뜻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삼법인은 불교의 인감도장이 라할 수 있다. 삼법인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변하는 것에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세 가지를 말하며, 일체개고 대신 모든 괴로움을 없앤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기도 하는데 이 네 가지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행무상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바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한다. 권세와 명예, 재산도 영속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죽음을 경험하거나 세도가와 재력가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설 때 겸허하게 마음을 비우게 된다. 그리고 차분히 모든 사물을 살피면 지금까지 자신을 유지해 온 생각이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잘못된 생각이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사물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것으로 보는 이 잘못된 생각을 버릴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알게 된다. 둘째, 모든 변하는 것에 자아의 실체(實體)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며 이것은 그 조건에 말미암은 것이다. 즉,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기 때문에 고정불변하는 실체란 없다.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 사고와 아집을 버릴 것을 요청한다. 자신을 포함한 어떤 존재도 영원한 것이 없기에 생각과 사물 역시 영원한 자기 것이 없는 법이다. 아집과 소유욕을 없애면 인연으로 형성된 존재의 실상을 깨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깨닫게 되면 인류세계의 화합과 평화가 먼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셋째,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고(苦)라는 것이다. 세상사는 희노애락이 있어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은 일시적인 것임에도 여기에 집착하여 고통을 낳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여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기쁨과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생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습성에 길들여져 있어 기쁨과 즐거움을 지속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부리지만,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진시황이 죽지않는 약인 불로초(不老草)를 구해 아무리 발버둥쳤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진시황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모든 영웅호걸과 미천한 신분의 사람도 항상 풍족하고 즐겁기를 바라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는 법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이루지 못하는 이런 욕망을 간파하시고 일체가 괴로움이라 설파하신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자가 욕망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구할 수 있다. 마지막은 열반 적정이다. 열반은 진리의 구현이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완전히 구현하여 모든 번뇌와 고통의 불을 끈 상태가 바로 열반인 것이다. 열반은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이다. 따라서 불자들은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 속에 구현하여 최상의 평화와 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3 사성제와 팔정도 -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 연기와 삼법인을 통해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 주는 길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란 ꡐ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ꡑ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최초의 설법이다.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연기의 진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 말하는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苦聖諦),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苦滅道跡聖諦)이다. <<잡아함경>> 사성제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의 소멸방법(道)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 고, 집, 멸, 도의 사성제라고도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삼법인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있다. 인간의 현실은 이 네 가지 고통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이 인간과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그러면 왜 고통은 발생하는가? 그것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자기 것이 본래 없는데도 헛되이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낳는 것이다. 이를 설명한 것이 집성제이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면 고통 없는 세계도 있고 그기에 이르는 길도 있을 것이다. 고통이 사라진 해탈, 열반의 세계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멸성제이다.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여덟 가지 길이 있으니 바로 도성제인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란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다.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부른다. 먼저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② 정사유(正思惟) : 바른 사유이다.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 바른 사유를 할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이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거짓말, 이간시키는 말이나 욕과 비방하는 말은 그 사람의 비뚤어진 생각과 시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항상 바른 생각과 말을 하여 구업(口業)을 짓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이다. 일체의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른 생각과 말에서 나아가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이다. 옳은 일에 종사하고 몸과 마음과 말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른 직업관을 가지고 생업에 임해야 한다. ⑥ 정정진(正精進) : 정정진은 깨달음을 향한 부단한 노력을 말한다. 아울러 옳은 일에는 물러섬 없이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⑦ 정념(正念) : 몸과 말과 뜻이 바르면 생각이 바로 선다. 정념은 바른 생각을 말한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수행이다. 번뇌, 망상에서 바른 견해나 행동이 나올 수 없다. 마음과 몸을 평안하게 하고 바로 수행해야 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참된 불자라면 항상 이것을 생각하고 잘 익혀 생활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4 업과 인과 - 불자의 가치관 부처님 당시에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가 유명했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하거나 쾌락과 향락을 쫓아 마음대로 살라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이 주장을 비판하시고 이들의 가르침이 초래할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셨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행위도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온다. 이를 ꡐ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ꡑ의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업(業)이라 한다. 업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에서 나온 말로ꡐ의도를 가진 행동ꡑ을 말한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설하셨다. 즉 스스로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며, 삶의 모든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설령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출생계급이나 삶의 조건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의한 과보이다. 만일 악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악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현재 행위를 보면 내생을 알 수 있다고 <<삼세인과경>>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과보를 초래하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혹(迷惑)이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혹(惑)- 업(業)- 고(苦)의 삼도(三道)라고 부른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게 된다.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을 보리심(菩提心)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업은 단지 어쩔 수 없이 받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 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다. 수행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로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업의 과보는 엄정한 것이어서 한치의 오차도 없다. 이것을 인과율(因果律)이라고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을수록 자신의 삶은 구속되고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나 선업을 쌓을수록 인생은 자유로우며 깨달음으로 나아갈 때 장애가 없어진다. 즉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스럽게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으며 또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중생의 마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3 불교의 역사 1 소승불교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마하가섭을 비롯하여 500명의 제자들이 왕사성의 칠엽굴에 모여서 교법과 계율을 수집, 편찬하였다. 이를 제1결집(結集)이라 한다. 이 결집에 의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가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 때 교법은 25년간 부처님을 시봉하며 가장 많이 듣고 자세히 알고 있던 아난 존자가, 그리고 계율은 지계제일 우팔리 존자가 먼저 이야기하면 나머지 제자들이 확인을 거쳐 합송으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한다. 이렇게 결집된 경전과 율법은 교단에 의해 전승되었는데 약100년 후 여기에 대하여 엇갈린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행 생활에는 종래의 계율을 지키기 어려운 점이 나타났고, 이것은 곧 교설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이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700명의 수행자가 바이샬리에 모여 교설에 대한 결집을 하였는데 이를 제2결집이라고 한다. 이 결집은 야사를 중심으로 한 장로(長老)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결정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던 수행자들이 새로 모여 대중부(大衆部)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교단은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로 나누어졌다. 이 분열 전까지 제1결집에 의해 전해 내려온 경전이 있었다. 이것을 ꡐ아함의 교설ꡑ이라고 부른다. 아함(阿含)이란 산스크리트어 아가마(Agama)를 소리대로 옮겨 쓴 말로 ꡐ전해 내려온 것ꡑ이라는 뜻이다. 이 시대 수행자들은 자기 견해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아함의 교설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는데 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라고 한다. 생존 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만나는 사람의 수준이나 처한 조건에 맞게 설해졌다.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하는데 사람의 그릇에 맞게 설법한다는 뜻이다. 까닭에 보기에 따라 산만하고 단편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교설을 분석하여 체계화한 것이 바로 아비달마인 것이다. 아비달마란 ꡐ교법(dharma)에 대한(abhi)ꡑ연구라는 뜻으로 ꡐ대법(對法)이라고도 번역된다. 2 대승불교 아비달마 교학은 부처님의 교설을 체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다른 한편 문헌에 매인 해석과 이해의 어려움으로 불교를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또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무위열반(無爲涅槃)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이러한 열반을 증득하는 아라한(阿羅漢)으로 상정하였다. 따라서 이상적 인간상인 아라한은 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철저하게 수행하는 출가수행자가 아니고는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출가자들은 전문적 학습을 위해 사원에 거주하며 대중과 멀어졌고, 난해한 교학은 대중에게 큰 장벽이 되었다. 이리하여 당시의 불교는 자리(自利) 위주의 불교, 출가주의의 불교, 학문적인 불교가 된 것이다. 불교가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때 교단한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입장을 소승(小乘, Hinay na)이라 비판하고, 중생을 구제하면서 깨달음을 구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인간상으로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대승(大乘, Mah y na)이라 불렀다. ꡐ보살ꡑ은 원래 부처님의 전생과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불탑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생애를 설명하던 사람들에게 성불을 목적으로 수행하고 남을 위해 헌신한다면 그가 바로 보살이라는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 이것은 획기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 수행자가 지향하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이었다. 성불이란 이룰 수 없는 것이라 여겨졌고 자신만을 위한수행이 주가 되었다. 그래서 대승은 자리 위주의 불교에서 자리와 이타행이 조화로운 불교로, 출가중심의 불교에서 출가와 재가가 함께하는 불교로 전환하였다. 한편 대승은 ꡐ큰 수레ꡑ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수행 방편을 제시하였다. 소승의 수행도 어려운 것이지만 세세생생 이타행을 서원하고 실천하는 것 역시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죽기 전에 부처님을 열번 부르는 것만으로 극락왕생을 약속하는 신앙이 출현하였으니 이것이 아미타불 신앙이다. 이것은 자력수행(自力修行)의 종교인 불교에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여 구제되고자 하는 타력이행(他力易行)의 신앙이 등장하였음을 뜻한다. 불교를 어렵게 느끼던 대중에게 타력 신앙은 매우 반가운 소식으로 불교가 널리 확산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재가 수행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승사상은 중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출가 수행자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교학 연구도 심화되어 아비달마 교학에 못지않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때의 교학 연구는 대중을 다양하게 섭수하는 방편 연구를 포함한 것이었다. 3 중국불교 불교는 인도에 탄생하여 동방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갔다.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아쇼카왕이 전쟁에 염증을 느껴 불교에 귀의하고 전도사를 전세계로 파견하여 불교의 세계종교화를 이룩하였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는 물론 이란과 그리스, 러시아까지 전도사들이 파견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중국은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로 주변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는데 불교사상과 자신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융합, 수용하면서 한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것은 불기 611(서기 67)년, 후한(後漢)시대 대월지국으로부터 가섭마등과 축법란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노자와 장자의 사상과 같은 성격의 사상으로 이해하였는데 이를 격의(格意)불교라 한다. 격의란 다른 사상의 개념을 빌어 풀이하는 것인데 반야 또는 공의 진리를 노장사상을 매개로 하여 이해한 것을 말한다. 이런 격의불교는 언어의 장벽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경전이 중국어로 번역되고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점차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대체로 경전 번역과정에서 나왔다. 이미 초기부터 안세고, 지루가참과 같은 역경승들이 있었지만 중국불교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바로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다. 그는 수 많은 대승경전과 율장, 논서를 번역하였는데 그의 번역은 정확성과 문장의 미려함, 그리고 번역 자체가 불교를 강술 하는 성격을 띠어 중국불교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격의불교를 극복할 수 있었다. 구마라집 이후의 경전번역의 가장 큰 성과는 삼장법사 현장(玄濱, 600~664)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7년에 걸친 구법여행 끝에 인도로부터 범어경전 657부를 가지고 돌아와 무려 75부1, 335권의 경전을 번역 편찬하였다. 그의 번역을 구마라집의 번역과 비교하여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중국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인도에서는 근본불교 시대를 거쳐 소승과 대승불교라는 불교의 역사를 거쳐왔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성하던 때였다. 그리고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구분 없이 번역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경전 가운데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다소 혼란스러웠다. 소승을 비판하는 대승경전 가운데 어느 것을 기준으로 체계를 세워야 하는가? 또한 천차만별의 중생을 위해 다양하게 설해진 방대한 경전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리하고 체계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각자 판단의 기준에 따라 부처님의 교설을 통일, 정리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일어나니 이것을 교상판석이라 하고 줄여서 교판이라고 한다. 이 기준에 따라 새로운 종지(宗旨)가 성립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각각의 종(宗)을 형성하게 된다. 이에 따라 13개 종파가 생겨나니 교판에 따른 종파의 형성은 중국불교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종파로는 구마라집의 제자 길장에 의해 확립된 삼론종(三論宗)과 천태지의에 의한 천태종(天台宗), 현장법사의 제자들이 세운 법상종(法相宗), 지엄의 화엄종(華嚴宗) 및 담란의 정토종(淨土宗) 등이다. 이 가운데 선종(禪宗)은 불교의 가장 중국적인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보리 달마대사를 개조로 하여 2조 혜가대사, 3조 승찬대사, 4조 도신대사, 5조 홍인대사로 이어지다가6조에 와서 남종의 혜능대사와 북종의 신수대사로 나뉘어지게 되는 선종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직접 대면하려는 직관직각(直觀直覺)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선종은 당대에 교학이 문자에 얽매여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참선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바로 나아가는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혜능대사는 이를 가리켜 "가르침 외에 별도로 전한 교의이며 따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敎外別傳 不立文字)"고 하였다. 문자에 의하지않고 곧바로 진심(眞心)에 계합하기에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하였다. 선종의 성립은 중국에서 불교가 이루어 낸 또 하나의 발전이다. 복잡한 교학 연구와 현학으로 인해 부처님의 참 뜻인 성불에서 멀어진 풍토를 일거에 혁신하고 성불을 지향하는 불교, 새로운 불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복잡한 교학 공부를 거치지 않고도 참선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자각은 모든 이에게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과 같이 선종은 역동적인 가르침이었다. 4 한국불교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공식 기록은 불기 915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중국 전진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도 출신으로 가야국의 수로왕비가 된 허씨 부인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가져왔다고 일부 학자들이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서기 372년 이전에 이미 불교가 광범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받아들인 시기에 불교는 격의불교였다. 이후 인도의 중관사상을 계승한 삼론종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가 성행하고 고구려불교는 정치적 세력 투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고구려의 패망을 맞았다. 백제는 불기 928(서기 384)년 침류왕 때에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 밖에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교학 연구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와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라에는 고구려의 묵호자에 의해 불기 961(서기 417)년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불기 1071(서기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되었다. 신라불교의 고승대덕들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이 전해지는데 원광-안함-자장-보덕-낭지-혜숙 -혜공-대안-원효-의상-태현 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일대 사상가들이 배출되면서 7~8세기에 화려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원광법사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에 세속오계를 주어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원효, 의상스님이 이루어낸 눈부신 교학 연구의 성과와 인재양성은 중국에서도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국불교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신라인들은 특히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라는 신념으로 가득차게 되는데 이를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이라 하며, 호국불교사상이라고도 한다. 이 신라인들의 불교를 매개로 한 정신적 통일과 힘의 결집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선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신라인들의 이런 사상이 투영된 것으로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도 불렀던 화랑과 불국사, 석굴암, 경주 남산 등의 불교성지를 들 수 있다. 용화향도란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여는 무리"라는 뜻으로 신라 땅에 미래불의 국토인 용화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화적 걸작은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인 발전을 포괄한 삼국의 성취였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면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깊이 뿌리 내렸다. 불교는 특유의 사상적 포괄성으로 민속 신앙을 섭수하여 큰 마찰 없이 우리민족의 전통사상과 문화로 자리잡았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과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 성과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다. 고려불교는 통일신라 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종의 흐름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 개산한 일곱 산과 고려 초의 두 산을 합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성립되었다. 이 선종의 구산에 교종의 다섯 가르침을 합하여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 한다. 오교구산이란 5개의 교종 종파와9개의 선종 종파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종과 교종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다양한 모습을 띤 것은 신라가 패망하던 시기 각 지역 호족세력의 발흥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지역의 호족 실력자들은 자신의 세력을 도모하기 위해 앞 다투어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모셨던 것이다. 고려시대 불교는 삼국시대에 이어 국교(國敎)의 지위를 확립하여 국가적인 지원 아래 지배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고려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도선국사의 영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과 탑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건축술도 뛰어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인정되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 때에 지어졌다. 아울러 불화(佛畵)가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데 국왕들은 대대로 당대 고승을 국사(國師)로 모시어 정신적인 지도를 받았다. 이에 따라 왕실의 후원으로 사찰이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스님들이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어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뜻 있는 스님들 사이에 권세를 멀리하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스님의 정혜결사, 요세스님의 백련결사가 그러한 예이다.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억압과 수난의 시기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주자학과 성리학으로 통치이념을 정립하여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비하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지대한 영향력을 주었던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백정과 같은 팔천민의 하나로 신분을 낮추고 서울 도성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뿐 아니라 불교는 셀 수도 없이 많았던 사찰을 몇 십 개만 남기고 강제로 폐찰 당했고, 각기 특성을 지니며 계승 발전하던 각 종단도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되는 등 세계종교사에서 드문 종교탄압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불교는 혹독한 억불정책 아래에서도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 명맥을 이어갔다. 비록 유교 성리학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왕족과 양반가의 부녀자들은 대대로 믿어 온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특히 태조와 세종과 세조, 정조 등은 매우 독실한 불자였으며,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시하면서 한문 경전을 민중들이 쉬이 알 수 있게 한글로 번역 시키기도 하였다. 서기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서산, 사명 대사가 구국을 위해 의승부대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수 많은 스님들이 피를 흘린 대가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얼마간 완화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혹독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 들어 유교질서가 한계를 들어내고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민중들의 삶이 어렵게 되자 사찰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 개혁적인 스님들은 유교지배 아래의 조선을 혁신하고자 민중과 더불어 여러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각종 민란에 스님들의 참여도 나타나게 된다. 특히 19세기 말 안으로 빈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와 밖으로 거대한 흐름으로 다가오던 서양열강의 침략 위협아래 불교사상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이동인 스님,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거사 등이 개화당을 결성하여 서기 1884년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아래 놓여있던 20세기 전반은 한국불교에도 암울한 시기였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는 일본불교는 정부의 후원 아래 각기 경쟁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포교 활동과 동시에 식민지지배의 정당화에 봉사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군사적인 침략에 앞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지배의 정보탐색과 지배 이념의 창출에 앞장섰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특히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정하여 시행한 <사찰령>은 조선불교를 식민지 총독 통제아래 놓이게 한 법이었으며, 이것은 일본에 대한 예속을 촉진하였다. 일제는 사찰령과 여러 조치를 통해 조선불교의 훌륭한 전통을 유린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권장한 것이었다. 사실 일본불교는 오래 전부터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었는데 이점은 조선불교의 청정비구와 대비되는 약점이었다. 이리하여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대부분 결혼하여 처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위배되었고 조선불교의 전통과도 어긋난 것이었다. 한편 식민지 시대에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켜 나가기에 위해 본사 주지들을 중심으로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법인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등 적지않은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불교청년회, 만당 등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 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불교정책을 거부하던 청정 비구승들도 선학원을 결성하여 자주적인 활동 거점을 유지하면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는 필연적으로 일제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가 과제로 제기되었다. 해방의 혼돈기에 불교개혁과 교단혁신을 위한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좌우이념 대립의 와중에 휩싸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쟁 직후 일제시대 합법화 되었던 스님의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교단 정화를 요청한 청정 비구들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친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러 차례의 혼돈 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조계종은 청정비구 중심의 출가승려로 재편되었고 여기에 반대한 스님들은 독립하여 창종을 하였다. 이리하여 이유야 어떻든 한국불교는 나 여러 종단으로 나뉘어졌으나 오늘날 불교계 각 종단의 협력 기구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구성하여 전불교도의 총의를 대변하고 있다. 한편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인 조계종은 1960~70년대 정화운동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분란이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뜻 있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포교, 역경, 도제양성이라는 종단의3대 과업이 정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불교 운동과 민중불교 활동이 전개되어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1994년 봄, 총무원장의 독단적인 종단 운영에 반발하여 일어난 종단개혁 운동은 많은 종도의 동참 속에 개혁회의라는 초법적인 개혁기구를 탄생시켜 각종 {종헌}과 [종법]등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고 총무원과 더불어 도제양성과 포교를 전담하는 기구로 <교육원>, <포교원>을 독립시켜 종단 활성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여전히 고난과 시련에 놓여있다. 아직도 민족이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으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서양화로 정신적인 혼돈, 물질 지향적인 가치관의 횡행, 민족문화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고 있다. 특히 산업문명의 부산물인 환경오염은 심각하여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갈망이 높아 가고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 한국불교는 민족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환경을 살리는 새롭고 건강한 문명창조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또한 물질과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지치거나 상처 입은 많은 대중을 동체대비(同體大悲)사상으로 포용하고 모두가 더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불국토를 이루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제가 우리 불자의 지혜와 노력에 달려있다.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고 믿으며 실행해 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불국토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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