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함께 사는 세상
1 공동체 생활 어리석게 살지 말라. 남의 흉내를 내면서 살지 말라. 잘못된 생각에 끌려 가지 말라. 그리고 물질에 너무 탐닉하지도 말라. 《법구경》 매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가정에서는 가족과 친척, 학교에서는 스승과 친구, 그리고 직장에서는 동료와 상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나중에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ꡐ너ꡑ와 ꡐ나ꡑ라는 입장에서 자기 것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시작된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ꡐ너ꡑ와 ꡐ나ꡑ로 나뉜 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무지에서 벗어나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결국 ꡐ너ꡑ와 ꡐ내ꡑ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ꡐ우리ꡑ라는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의식을 가질 때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층 가깝고 따뜻한 사이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수행이 필요하고, 자신보다 나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배우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자신도 과거에 그러했음을 반성하며 친절하게 일러주는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행동은 어디서나 문제의 화근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대는 사람은 물길을 바로잡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바로잡고 저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 현명한 이는 지혜롭게 자신을 다스린다. 《법구경》 1 수행과 화합의 공동체 거대한 댐이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듯이 사회라는 큰 틀도 개인의 변화에 크게 좌우된다. 특히 도시화 되고 문명의 이기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있어 개인의 깨달음과 바른 삶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개인의 변화는 이 시대 개혁의 출발점이자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동체에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도덕과 최소한의 규범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불자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의 원칙으로 다음의 열 가지를 말씀하셨다. 이 열 가지 원칙들은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에 바탕을 둔 것으로, 몸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 입은 네 가지, 생각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이다. 첫째로 몸과 관련된 규칙으로는, 남의 것을 훔치기 보다는 남에게 베풀 것(不偸盜), 다른 사람과 삿된 관계를 갖지 말고 정숙한 생활을 할 것(不邪游), 술에 탐닉하지 말 것(不飮酒)을 강조하셨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다른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근원이 된다. 둘째로 입으로는 먼저, 남에게 거짓말보다는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불망어(不妄語)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것은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당당한 사람이 되어 거짓말에 쏟는 정열과 노력을 돌려 정직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욕설보다는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안온한 상태에서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불악구(不惡口)이다. 남을 속이는 일은 나를 속이는 일이고 이런 행동이 점점 심해지면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의식은 언제나 잠재하고 있어 나중에는 스스로 항상 누가 나를 속이지나 않나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깊어지면 심리적 변화를 유발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른 말을 하여 신뢰의 바탕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불기어(不綺語)이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의식에서 나온 속담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경우 믿음보다는 불신이 심화될 것이다. 불자들은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남들을 이간시키거나 불신의 소지를 남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간질이 깊어지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을 피하는 길이 불양설(不兩舌)이다. 셋째는 생각과 관련된 규칙들이다. 우리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 사실 잘못된 행동을 돌아보면 탐욕이 그 근원이다. 따라서 탐욕을 버리는 정신수양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늘 무욕의 경지를 설하셨다. 한편, 잘못된 생각 한번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는 때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성냄이 그 으뜸이다. 따라서 자신의 성격을 잘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냄이 없는 경지를 무에(無 )라고 한다. 2 보시(布施)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걸 좋아 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보다 높은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게 된다. 《법구경》 옛날 인도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베풀어 주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자신의 복을 짓게 해준다고 믿고 의지하며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주었다.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복전 또는 복밭이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보시라 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신 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머무르셨다. 부처님께서 보이신 연민과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연민과 사랑의 마음인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보시이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풀어 주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시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는 것이다. 보시는 우리의 집착과 그로 인해 생긴 모든 번뇌를 없애주는 길이기도 하다. 탐욕을 버리는 가장 좋은 길은 첫째,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요. 둘째, 행동으로 나의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마음이라 한다. 어떤 마을에 두 거부가 있었다. 갑(甲)은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는 반면 을(乙)은 그렇지 못했다. 많은 보시와 좋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을은 존경을 받지 못하자 항상 그것을 궁금하게 여겨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을이 집 근처의 숲을 거닐고 있을 때 거지가 앉아 있었다. 을은 그에게 돈을 주고 돌아왔다. 다음날 을이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전날 보았던 거지가 또 그 자리에 앉아 있자, 을은 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그에게 돈을 주었다. 그리고 을은 거지에게 갑도 돈을 주더냐고 물었다. 그러자 거지는 을을 바라보면서 갑 또한 자신에게 돈을 주지만 을처럼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때에 을(乙)은 자신이 존경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처럼 보시를 행할 때에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물질의 소유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이다. 부처님은 보시할 때 어떠한 보답을 바래서는 안되며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보시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3 지계(持戒)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전생에 옷을 꿰매다가 이(옷이나 머리 속에 사는 벌레)의 등을 찔러 죽인 대가로 열반에 들기 전에 등창이 생겨 고생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알게 모르게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 온다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행위를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동기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되지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 악한 행위에 좋은 결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행동은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결국 우리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과 같이, 우리가 ꡐ별거 아니겠지ꡑ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좋은 행위는 쉽게 몸에 배이지 않지만, 나쁜 행위는 그렇지 못하다. 항상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을 다스리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일체 보지 말라.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그대 자신의 잘못은 반드시 되돌아 보라 《수타니파타》 4 인욕(忍辱) 불교를 흔히 수행의 종교라 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탐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고, 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혹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로 하여금 분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하는 상대방이 있을 때에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 마치 초보 운전자가 길과 교통체계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행동)을 보고 경멸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와 이해하는 참을성을 길러야 하겠다. 5 정진(精進)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해도 과거의 탐욕에 길들여진 버릇을 하루 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흔들고 허물어 버리는 삼독심이 솟구치곤 한다. 그러므로 보다 굳건한 마음으로 생활하면서 과거의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그 길을 용감하게 가는 일이 중요하다. 반복하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 보다 더 끈질기게 다시 떨치고 일어나는 용맹한 정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도 정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결과에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안다면 정진에 많은 장애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더욱 열심히 깨달음의 길을 향해 정진해야만 어제와 다른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6 선정(禪定) 앞에서 본 것처럼 선정은 개인의 수행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싸움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내가 먼저 인욕하고 깊이 있는 생각으로 모든 행동을 차분하게 처리한다면 상대방도 다투려는 마음보다는 평온한 마음으로 상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수행인 선정을 닦아야 한다. 선정은 지혜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머리가 좋은 사람만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학벌과 학위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어떤 것에 대한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그 동안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전체의 모습과 나와 남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삶의 전과정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지킬 것과 얻을 것, 버릴 것 등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7 지혜(智慧)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꽃피울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향기를 준다. 마치 언덕에 곱게 핀 꽃이 그윽한 향기를 바람에 실어 그 향기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듯이, 지혜로운 이를 곁에 사는 삶은 나와 이웃 그리고 자연의 세계를 정화시키는 감로의 물줄기가 될 것이다. 스스로 깨끗한 사람이 되고, 서로 동정심을 가지고 청정한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라. 그곳에서 서로 사이 좋게 총명하게 그리고 고뇌를 없애도록 하라. 《수타니파타》 2 사람과 사람사이 부처님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길을 제시해 주셨다. 그 길을 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부처님께서 밝혀 놓으신 길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비추어 보도록 한다. 1 부모와 자식 바다와 같이 넓고 끝없는 사랑을 우리는 흔히 부모의 사랑이라 한다.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여 스스로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부모는 자식을 위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 분신과 같은 소중한 존재이며 활기와 희로애락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모와 자식 사이는 인륜이 아니라 천륜, 즉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일과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첫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 자식이 악행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셋째, 적절한 교육과 생계의 수단인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어야 한다. 넷째, 결혼할 때가 되어 배우자가 정해지면 가정을 이루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는 어느새 나이가 들어 자식들에게 의지하여 살게 된다. 이것은 자식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의지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효도라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은 첫째, 늙으신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항상 보살펴 드려야 한다. 둘째,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집안 일을 이어받아 바르게 처리해야 한다. 셋째,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며 그 뜻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부모와 자식간의 세대차이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세대나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다정 다감한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부모를 인생의 선배로서 존경할 줄 아는 자식이 되면, 소위 세대간의 벽도 허물 수 있게 될 것이다. 2 스승과 제자 서당에서 양쪽으로 댕기를 맨 아이가 종아리를 드러내고 스승 앞에 서있는 모습을 그린 옛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에 훈훈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매를 맞으면서도 익살맞은 표정을 짓는 학동, 엄한 얼굴이지만 친근감이 느껴지는 스승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제지간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시대에서 이러한 모습을 요구하기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스승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지식을 제자에게 가르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자를 격려하고 직접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고, 제자는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스승을 존경하고 받들면서 살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3 부부 불교에서는 전생부터 지금까지5백 생의 인연이 있어야만 부부가 된다고 한다. 그만큼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의 만남은 소중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부부라고 했다. 부부는 흐르는 물과 공기처럼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을 잃게 된다면, 그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의 가족이라는 사회를 형성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자식들은 그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문제 있는 부모로부터 문제아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부모에게 문제가 생겨서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말한다. 부모의 불화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것은 자식들이다. 순간의 기분에 이끌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내던져 버린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부모를 섬기는 것,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수타니파타》 4 친구 친구는 제2의 ꡐ자신ꡑ이라 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도 친구를 잘못 만나면 나쁜 길로 빠지는 경우를 본다. 친구를 사귈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친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느냐?하는 양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있느냐?하는 질이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존자가 있었다. 이들은 한 스승 밑에서 함께 수행하던 친구였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서로 연락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살다가 어느날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가까이 하면 유익한 친구와 멀리 해야 할 친구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까이할 친구> 첫째, 친구가 취했을 때 재산을 지켜주고 두려워할 때 보호자가 되어 주며, 필요한 때는 내가 필요로 하는 두 배 이상의 재산이라도 줄 수 있는 친구이다. 둘째, 즐거우나 괴로우나 항상 변하지 않는 벗이란 자기의 비밀을 말해주고 또한 나의 비밀을 지켜준다. 재산을 잃어 가난해졌을 때도 버리지 않고, 친구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버리는 친구이다. 셋째, 착한 말만 하는 친구는 악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한다. 새로운 정보를 말해주고 성인의 가르침을 말해주고 인도해 주는 친구이다. 넷째, 동정 있는 벗은 친구가 약해졌을 때 기뻐하지 않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도 기뻐한다. 비난하고 험담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찬양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친구이다. 나의 결점을 일러주는 친구, 나의 결점을 꾸짖어 주는 친구, 이런 사람 만나거든 그를 따르라. 그는 나에게 보물이 감추어진 곳을 일러주는 사람 같나니 그를 따르면 많은 이익이 있다. 《법구경》 <멀리할 친구> 첫째, 무엇이나 눈에 띠는 것은 가져가고,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으려 한다. 자발적이 아닌 두려움에서 일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한다. 둘째, 교묘한 말로 우정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필요 없는 애교를 부린다. 해야 할 일이 눈 앞에 닥치면 태도가 달라진다. 셋째, 감언이설로 상대방의 나쁜 일에만 보조를 맞추고 좋은 일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사람 앞에서는 칭찬하고 돌아서면 비웃고 험담한다. 넷째, 생활이 문란하고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같이 즐길 때는 좋지만, 결국 무기력하고 사회에서 쓸모 없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친구마저 파멸시키므로 멀리해야 한다.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 직장에서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절반 이상이 직장에서 받는 것이라고 한다. 과다한 업무와 직장 동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받는 심리적 압박감은 대단히 심각하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기만 한다면 서서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먼저 달라지면 전체 사회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서로에 대한 작은 관심과 격려, 그리고 이해를 통해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을 만들어 가야 한다. 상사는 부하 직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일에 대한 흥미와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또 적당한 여가를 주어 생활의 활기를 찾도록 해주고, 잘못이 있을 경우엔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잘 타일러준다.
반대로 부하 직원은 직장과 인생의 선배인 상사를 존중해야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상사가 없는 곳에서 험담을 해서는 안된다. 직장은 가정 다음으로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직장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따른 보수로 생활을 한다. 서로 존중하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자기 성취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6 타종교인과의 관계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와 더불어 사는 곳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중에서 다른 종교에서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고 만약 그 가르침을 믿지 않을 경우 끝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생하지 못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타종교의 역사와 교리가 서로 다르다고 하여 타종교인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타종교인에게도 깨달음을 전해주어 함께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 참다운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들도 모두 청정한 삶의 세계인 불국토를 만들어갈 수 있는 동지적인 동시에 그 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문화에 살아 숨쉬는 불교의 사상은 다른 민족이 갖고 있는 사상과 문화를 섭수하여 우리민족의 문화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 따라서 타종교인에 대한 관계도 그들과 함께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고 보존 한다는 입장에서 상호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3 청정한 세상을 위하여 한때 우리나라는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하여 물 맑고 공기 깨끗하며 경치 좋기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수탈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난 뒤의 경제발전의 대가로 우리는 금수강산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에 공해, 폐수, 생태계 파괴 등의 용어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주위에서 환경보호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우리 모두가 환경문제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이 환경문제가 우리의 생활과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최근의 몇 차례 물 파동을 겪으면서 우리들은 수돗물이 마음대로 마실 게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이름난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마실 물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는 생수를 만들어 파는 업체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외국의 물을 수입 해다 팔기도 한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깨끗한 약수 물을 구하러 산에 오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나마 약수 물도 믿지 못해서 전문 생수업체에서 생수를 사서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기는 또한 어떠한가? 도시 근방의 산에라도 올라 보면 탁 트인 풍경이 우리를 반기는 것이 아니라 희뿌연 먼지로 덮인 회색 도시만이 나타난다. 비라도 오면 이 비가 산성비는 아닐까?하는 걱정이 앞서고 그래서 함부로 비 맞을 엄두를 낼 수 없다.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 속의 도심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는 누구라도 느껴보았을 것이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실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오존층이 파괴되는 현상도 지구 전체로 본다면 인류 생존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물과 공기의 문제만이 아니다. 쓰레기, 중금속, 방사능등등 이외에도 환경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오래 전 옛날에는 환경오염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자연 속에서 너무나 미미했으며 그나마 자연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동들도 포용할 수 있는 순탄한 재생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연의 재생력이 둔화되었고, 이제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17~18세기 이후부터 서양의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산업화가 이루어진 시기부터 였으며 우리 나라로 한정해서 본다면 60~70년대의 경제개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 대한 훼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들은 태양에너지로부터 에너지를 공급 받아 자라고 있으며 이 동식물들은 서로간에 다양한 먹이사슬을 유지하며 하나의 균형 있는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연환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베고 물을 끌어당기고 도시를 건설하고 전기를 만들어냈다.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여러 생활 용품들을 만들어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인구와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생산활동, 그리고 물질적 생활은 어느새 자연 생태계의 원활한 흐름을 위협하게 되었다. 과학문명과 경제개발만으로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과학문명과 결합된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욕심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생태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연을 그저 개발하고 이용할 대상으로만 보았으며 자연이 인간과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늘어가는 물질적 풍요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개발의 훌륭한 성과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졌던 것이다.
일찍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식량은 산술 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말한 서양의 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러한 인구증가가 일으키는 문제보다 사람의 욕심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은 미처 생각치 못한 것 같다. 간디는 ꡒ자연의 자원은 인류가 생존하기에 충분한 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ꡓ고 말했다. 그러한 인류의 탐욕으로 마침내 자연은 돌아올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문제를 두고 우리 불자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연기의 가르침은 이러한 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자연과 우리는 원래 둘이 아니며 서로 의지하면서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동체대비라는 말이 있다. 이는 환경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교정 시켜주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리라고 본다. 자신과 환경이 둘이 아니라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망치는 일을 하지않듯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기본적 요소는 아무래도 의식주 생활일 것이며 현대의 물질 문명 역시 의식주 생활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부처님 당시의 의식주 생활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모범이 될 것이다.
만족을 아는 생활, 무소유와 근검절약이라는 생활원리는 환경을 살리는 길이며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예를 들어 발우 공양을 하는 경우 음식쓰레기를 줄이고, 수질오염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 된다. 나 하나의 실천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소극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는 적극적인 사명감으로 생활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찰 주변은 그나마 청정한 지역에 속하며 이를 계속 지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절에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만약 차를 가져갔을 경우에는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가급적 걸어서 참배를 하도록 함이 좋겠다. 또한 계곡을 올라가면서 계곡 주변에서 취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정된 장소에서 취사하도록 권유하고 청정구역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반드시 분리수거를 하고, 합성세제, 1회 용품 등 환경오염의 소지가 있는 제품의 사용은 자제하며, 절제된 소비로 지나친 자원낭비를 줄여가야 하겠다.
불자들이 생활에서 구현하는 이 실천은 개인적으로 다소 번거로운 점도 있을 것이지만 환경보호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심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또한 개개인은 사회 속에서 환경보호의 파수꾼이 되어 환경을 지켜나가도록 해야 한다.
기업가는 자신의 상품생산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과학자는 과학자대로 자신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환경보호활동을 펼쳐야 한다. 환경보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각종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의식 전환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고 그래서 자연의 파괴를 부추기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ꡒ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ꡓ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기에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 또한 그 삶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자연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다. 4 통일을 준비하는 불교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그 기쁨을 누려 보기도전에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으며 그 고통의 시간도 어언 50여 년에 이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단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되는 고통을 겪었으며 그 아픈 사연들을 속으로만 갈무리해야 했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지난 시절 동안 국내외적인 여건이 통일에 대해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반세기 동안에 통일을 향한 진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불자들은 불자들 나름대로 통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독일의 통일에서 보여지듯이 갑자기 통일이 실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대는 변한다. 탈냉전시대를 맞으면서 세계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이 붕괴되었으며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동서독은 통일의 감격을 이루게 되는 등 대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우리나라의 내부상황도 상당히 개선되어서 대내외적으로 남북간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있는 등 우리민족은 다시 금 통일을 향한 꿈을 키울 수가 있게 되었다.
남북간에 쌀이 교환되고 기업인들과 과학자들이 교류하고 있는 등 이전 같지않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도 통일을 향한 길은 그리 쉽지 만은 않아 보인다. 현재 이산가족의 상봉은 고사하고 생사 확인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고 보면 우리 불자들 아니 우리 국민 모두에게 통일은 여전히 민족의 커다란 소원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민족 분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민족의 동질성 회복은 자꾸만 어려워져 가는 것이 사실이다.
민족의 통일은 정치적으로 한 나라가 되는 것에 앞서 정신적으로 한 나라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독일 통일에서 보듯이 통일 후의 동서독 국민간의 사회적 괴리감과 정신적 갈등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민족의 통일에서는 그러한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통일은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전 영역에 걸친 모든 여건을 고려함으로써 독일 통일 후에 나타난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남북의 동질성회복과 연관되어 있으며 동질성의 회복은 정부 당국자 몇몇의 정책을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온 국민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국민 모두가 사회 각 분야에서 통일에 대한 지속적이고 다양한 논의를 일으키고 관심을 가진다면 현재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통일정책과 어울리면서 민족통일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서 경제, 예술, 스포츠, 학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노력이 시도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은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 역시 민족 동질성 회복과 통일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과 역할을 수행해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불교계의 이러한 역할은 이미 삼국통일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자리잡아 왔다.
일찍이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원효스님이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민중에게 불교 사상으로 동질감을 회복시켰고, 화쟁 정신으로 갈등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한 역사가 있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에도 대장경을 조판하면서 꿋꿋이 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불교의 힘이 적지 않았다.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조선시대에서 조차도 임진왜란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민중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애쓴 사실은 불교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여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통일을 준비하는 불자들은 우선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그러면서도 쉽지 않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족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풀어야 한다. 증오와 미움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미움을 간직한 채로는 다른 한쪽과 손을 맞잡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런 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미움으로 인한 또 다른 갈등이 생기게 된다. 미움과 증오를 버리는 것이 민족 화해의 첫걸음 이기도 하며 민족 동질성 회복의 초석이 된다. 불교계가 민족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선 남북간의 불교교류를 활발히 전개해야 할 것이다.
교류를 통한 남북간의 다양한 접촉이 서로의 이해를 도와주는 계기가 될 것이며 분단의 아픔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 시킬 수 있는 자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각 사찰에 대한 상호방문 및 서신교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 등 다채로운 교류의 길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 사찰을 복원하거나 신축하는데 같이 참여하거나 불교병원 등의 복지사업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은 불교도만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타 종단과의 통일을 위한 교류를 함께할 필요도 있다. 통일을 위한 다양한 노력에 불교가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통일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동질성의 회복이다. 더욱이 불교는 인간 내면적 심성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불교인들도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에서 담당할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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