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백두대간Ⅰ(終)

[14차] 도래기재->옥돌봉->박달령->선달산->갈곶산->마구령->고치령

雪松 2010. 4. 22. 12:35

 백두대간 종주(南進)14차(선달산구간).

 

◈ 일시 : 2006년 01월 07일    토요일    

날씨 ; 맑은후 가끔흐림    기온 ; (아침/대전 기준) 영하 12도

◈ 위치 : 영월군 하동면 경북 영주시 부석면. 물야면. 봉화군 춘양면

◈ 코스별 거리 :도래기재-(2.6㎞/55분)-옥돌봉-(3㎞/45분)-박달령-(5.1㎞/1시간50분)-선달산-(1.77㎞/30분)-늦은목이-(1.03㎞/30분)-966봉(갈곶산)- (4.9㎞/1시간40분)-마구령-(7.6㎞/2시간20분)-고치령
총 산행거리 :26km(포항 셀파 산악회 측정거리임)

◈ 주요 구간별 산행소요시간 :
      -10시 15분 - 도래기재[770m](88번지방도) /산행시작
      -11시 10분 - 옥돌봉[1242m] 
      -11시 55분 - 박달령[1009m] 

      -13시 45분 - 선달산[1236m] 
      -14시 15분 - 늦은목이[800m] 
      -14시 40분 - 갈곶산[966m] /봉황산 갈림길 
      -16시 20분 - 마구령[810m]]/935지방도. 비포장.
      -16시 55분 - 1096.6봉 
      -18시 40분 - 고치령[760m] /산행종료
       총소요시간 :8시간 25분

◈ 산행개념도 :

 

 

 ▲ 구간개념도

 

  2006년 새해들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백두대간 남진 14번째 산행길이다.
어제가 일년중에서 가장 춥다는 소한이었다.

오늘도 전국이 영하 10도 이하의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번 13차 산행때 태백산 정상에서 영하 28도의(고도계에 찍힌 새벽 기온) 매서운 추위를 경험한터라 추위에 대한 만반의 대비를 해서인지 오늘의 도래기재 추위쯤은 오히려 포근하다는 생각도 든다.


산행이 시작되는 도래기재는 경북 봉화와 강원도 영월을 잇는 88번 지방도가 지나는 해발 770m의 고갯마루이다.
그동안지루하고 불편했던 무박산행에서 벗어나 오늘은 모처럼 당일 주간 산행이다.

 10시 15분 도래기재에 도착하여 정상 서쪽의 나무계단을 따라 남진 14번째의 산행을 시작한다.

 

 

 

 

 ▲ 10시 15분./ 도래기재.

 

 

 

산행이 시작서부터 계속 오르막이 이어지다가 올라갈수록 경사가 더 가팔라진다.

그런 길을 10여분정도 올라가면 진달래 터널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곳을 통과하고,

그 후 얼마 가지 않아서 '50년 생 진달래 나무를 보고 가세요'라는 안내판이 서 있지만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

 

그곳엔 수령이 500년 된 직경 30cm 정도 되는 큰 진달래 나무가 있는데, 이 진달래 나무는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오래된 진달래 나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기회를 놓쳐 버렸다.

 

 

 

 

 ▲ 옥돌봉 정상.

 

1,055m봉을 지나 한시간 만에 옥돌봉 정상(1,242m)에 이른다.

옥돌봉은 일명 옥석산(玉石山)이라고도 부르며, 정상 한쪽에 까만 오석으로 된 정상석이 서 있다.

 

북동쪽 나뭇가지 사이로 지난번에 걸어 왔던 함백산과 태백산, 구룡산이 보이고,

남서쪽으로는 선달산(7km)과 그 뒤로 소백산(27km)능선이 아련하게 보인다.

이곳이 오늘산행길 중에서 가장 조망이 좋았었던 곳으로 기억된다.

 

옥돌봉에서 약 5분정도 가다보면 오전리 약수터로 내려가는 길과 갈라지는 주실령 삼거리에 이른다.

김영섭 대장님도 이곳에서 무심코 직진을 해 버리면 오전리로 내려가 버리니 각별히 조심하라던 곳이다.


대간 길은 오른편(서쪽)으로 이어진다. 이후 한동안 비교적 손쉬운 내리막길이 이어지다가 내리막이 끝나는 안부에서 크지않은 오르막내리막이 이어지다 옥돌봉을 떠난지 45분만에 박달령에 내려선다.

  

 

 

박달령(朴達嶺. 1,074m)

 

 

박달령은 옥돌봉과 선달산 사이에 있는 안부로서 해발 1,009m 정도 되는 고갯마루이다.

정상에는 널따랗게 잘 정비된 헬기장이 있고, 한쪽에 산신각이 있다.

전각 형태의 쉼터와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어서 야영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박달령 정상으로 오르는 임도길은 상당히 관리가 잘되어 있어서 사륜구동형 차는 올라올 수가 있을 듯 하다.

 

박달령을 출발하면서부터 체력 소모가 크지 않은 올망졸망한 오름길이 반복된다.

박달령을 떠난지 한시간 정도를 지났는데 '선달산 1시간 10분, 박달령 1시간'이라는 나무팻말이 보인다.

 

옥돌봉에서 잠시 트였던 조망은 산행내내 사방이 모두 잡목에 가려 조망을 볼 수가 없다.

더구나 아침에 깨끗하던 하늘금 위로 깨스가 차서 먼곳의 시야는 영영 볼수 없게 되어 버렸다.

 

선달산까지 가지 못하고 바람이 가려진 양지바른 남쪽 산자락에 동그랗게 모여 점심상을 펼친다.

추운 날씨를 예견한듯 빵이나 떡으로 점심을 대신 해결하는 사람이 많다.

배낭속에 넣어 놓은 물병이 얼어붙어 물이 나오지 않는다. 오늘도 대단히 추운 날씨이다.

 

 

 

선달산(1,236m)

 

선달산보다 10m가 높다는1,246m봉에서 10분정도 지나 13시 45분 선달산 정상(1,236m)에 선다.

덕유산처럼 고만고만한 두개의 봉우리가 붙어있는 선달산은 쌍봉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정상 주변에 숲이 우거져서 조망이 모두 막혀 있으나 북쪽방향 나뭇가지 사이로 지난번에 지나왔던 함백산과 태백산이 보이며, 동쪽으로 봉화의 문수산도 보인다.


정상 공터 한가운데에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반쯤 썩은 정상목을 주워 제자리에 세우고 이곳을 지난 기념사진을 찍는다.

 

 

 

 

 

늦은목이(800m)

 

선달산에서부터 완만한 내리막길이 30∼40분정도 이어지더니 오후 두시가 조금 넘은 시각 늦은목이에 이른다.
이곳에서부터는 소백산 국립공원지역이 시작된다.

늦은목이 고개는 소백산 국립공원의 가장 동쪽에 해당하는 곳인 셈이다.

 

국립공원 공단에서 설치한 조그만 현수막이 찢어질듯 바람에 나부낀다.

볼과 귀등을 방한모등으로 감싸보지만 속수무책으로 불어대는 매서운 칼바람을 피할수 있는 방법이 없다.

 

 

 

갈곶산

 

늦은목이에서 갈곶산까지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30분정도 오르면,

'봉황산 갈림길'이란 이정표가 있는 갈곶산 정상(966m)에 이른다.

이곳 갈림길에서 남쪽으로 지맥 끝자락에 위치한 봉황산은, 남쪽으로 부석사(浮石寺)를 품고 있는 산이다.

갈곶산 정상 부근과 대간길 주변으로 온통 '털진달래'라 부르는 키가 큰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을 바꾸어 대간 길에 들어서면 완만한 내리막오르막이 계속되는 아주 지루한 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20여분간은 심한 오르막이 이어지면서 무명봉에 올라선다.

 

 

 

 

1,057m 조망이 전혀 없는 1,057m봉 헬기장을지나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고도를 낮추어가다

 20∼30분 정도 내려가면 또하나의 조망이 좋은 894m봉 헬기장에 닿는다.


894m봉은 다른 봉우리에 비해 고도가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동-남쪽으로 시야가 열려 있어서

봉황산(818.9m)이 보이고, 그 아래 산곡 마을인 부석면 임곡리 일대가 내려다보이며,

선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거기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마구령에 내려선다.

 

 

 

  

마구령(820m)

 

마구령(820m)은 경북 영주시 부석면 임곡리에서 서쪽 부석면 남대리로 넘어가는 비포장 고갯길이다.
길바닥이 얼어 있기는 하나 노면 상태가 좋아 승용차 서너대가 이곳까지 올라와 정차하고 있다.
이곳사람들은 이고개를 '메기재'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벌써 오후 4시 20분이다. 도리기재를 떠난지 6시간이 넘었다.
산속에서는 평지보다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 법이다.
벌써 산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고 짙은 산그림자속에 어둠이 시작될 징조가 보인다.

 

 

 

▲ 1,096.6봉.

 

마구령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힘들게 올라가면 50여분만에 커다란 헬기장이 있는 1,096.6봉에 도착한다.
정상은 전체가 눈으로 덮여있고 살속을 파고드는 칼바람 또한 매서웁다.


산에서의 행동간식은 힘이들고 지쳤을때 최고의 보약이다.

바람을 피해서 모여 앉아서 남은 먹을 거리를 모두 꺼낸다.

고도표에 보면 여기서부터 고치령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내리막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냥 내리막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르막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지면서

크고 작은 20여 개 이상의 봉우리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든다.

비록 작은 봉우리라지만 도래기재를 출발하여 이미 7시간 정도를 걸어온 터라 쉽게 생각하면 안될 곳이다.

 

 

 

 

▲ 해가 진다.

 

잡목사이 너머로 길게 소백산 마루금이 펼쳐지고, 그 마루금위에 붉은 해가 걸리었다.
지금시긴 오후 5시 20분이다. 소백산으로 넘어가는 아주 특별한 일몰을 경험하고 있는것이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어져 나뭇가지 떨리는 소리가 한많은 어느 귀신의 절규처럼 들린다.


날이 점점 어두워져 앞을 분간하기 조차 어려워 할수 없이 헤드랜턴을 꺼낸다.
왼쪽 산아래로 멀리 민가의 불빛이 보이지만 얼마를 걸어가도 불빛은 멀찌감치 그자리에 있다.
한봉우리를 오르면 또 산이 보이고 또 올라보면 신기루는 아닐텐데 저만치에서 또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모두 몸과 마음이 지쳤다는 증거이리라.

 

 

 

▲ 미내치

 

미내치는 백두대간 서쪽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와 백두대간 동쪽의 부석면 소천리 달터마을을 잇는 해발 830.1m 고개마루이다.

 

미내치에 설치된 이정표에서 '고치령이 3.2km남은 것을 알수 있고, 다시 20여분 가다보면 고치령이 2km 남았다는 이정표가 서 있다.


그리고 여기서 몇번을 오르내렸는지 모르지만 또다시 고치령 1km지점을 알리는 지점을 지나면서, 오른쪽 90도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15분정도 내려가다보면 하산 지점인 고치령에 도착하게된다.

 

 

 

고치령 산신각.

 

태백산과 소백산으로 넘어가는 해발 760m의 고갯마루인 고치령에 세워진 이 산신각은

원래 세조(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단종(端宗)과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원혼을 모신 사당이었다.

단종의 원혼을 태백산신이라 하고, 금성대군의 원혼을 소백산신이라 하여 양백(兩白)의 두 산신으로 모셨던 것이다.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찬탈 당하고 단종이 영월로 귀양갔던 1457년(세조 3년), 수양대군의 동생이자 단종의 삼촌인 금성대군도 순흥도호부(지금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로 유배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 단종 복위를 바라던 금성대군의 밀사가 고치령을 넘어 영월의 단종을 배알하러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순흥부사였던 이보흠(李甫欽) 역시 금성대군과 뜻을 같이 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면서 영월의 단종을 뵈러 고치령을 넘어 다니면서, 이 고개에서 더욱 결의를 다지곤 했다.

 

그래서 고치령을 일명 건의령(建義嶺)이라 하기도 했다. 순흥→좌석리→고치령→의풍→영월은 지도를 펴놓고 볼 때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있어서 순흥도호부에서 영월로 가는 최단거리 지름길이었다.

 

그러므로 금성대군의 밀사나 이보흠의 밀사도 이 길로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순흥도호부의 관노 하나가 이 사실을 밀고하여 그 전모가 탄로 나면서 이보흠을 비롯한 관련 인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단종과 금성대군마저도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억울하게 죽은 단종과 금성대군의 혼령을 각기 태백산과 소백산의 산신령으로 모셔 고치령 정상에 신령각을 세웠던 것이다.

 

 

▲ 고치령.

 

8시간25분의 길고도 긴 산행을 마치고 깜깜하게 어둠이 내린 저녁 6시40분 마침내 고치령에 내려선다.
내려오는 길 옆으로 산신각이 보이고, 도로입입구로 장승도 세워져 있다.

그리고 백두대간 길목임을 표시하는 표지기가 곳곳에 요란스럽게 걸려 있다.

 

하지만 아직 산행이 끝난것은 아니다.

대간길은 아니고 단순히 접속거리에 불과 하지만 차량이 서 있는 좌석리까지는 4km정도를 더 내려가야 한다.

평소 같으면 4km는 힘든길이 아니지만 오늘은 8시간 이상을 걸어와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있고 상태이다.

 

길 한쪽 공터에 봉고 트럭이 시동을 걸고 서 있다.

이동네에서 대간꾼을 상대로 영업하는 화물차랑인데 평소에도 삼만원씩 받는다고 한다.

호로도 씌우지 않은 화물차 뒤에 실려가야 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이가격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대쪽 소백산을 넘어온 대간꾼들과 함께 차량비용 삼만원을 지불하고 화물칸 뒤에 실려서 우리를 싣고 왔던 버스가 기다리는 동네까지 내려왔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