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백두대간Ⅱ(終)

[3차] 매요리->사치재->697봉->새맥이재 ->복성이재

雪松 2010. 9. 27. 18:14

  백두대간 왕복종주(北進)/ 3차

 

 

제3차 : 매요리->사치재->697봉->새맥이재 ->복성이재

 

 

*일시 : 2010년 9월 26일(일요일)   

 * 날씨 : 흐림.

 * 누구와? : 대자연 산악회 10차(8차) 백두 대간 종주팀과 함께..

*코스 및 거리 : 총 산행거리 11.01km(포항쎌파산악회 실측자료 인용)  

   매요리-(3.3㎞)->사치재-(2.93㎞)->새맥이재 -(1.4㎞)->시리봉-(3.38㎞)->복성이재.

 * 누적거리 : 총734.65km중/ 42.08km진행.

구간 진행시간(총 3시간 50분/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 10:10 - 매요리.

    ○ 10:57 - 사치재

    ○ 11:10 - 697봉.

    ○ 13:25 - 아막산성.

    ○ 14:00 - 복성이재

 *개념도

 

 

 

▲ 진행 개념도.

 

 

 

   얻그제가 우리민족의 명절 "중추가절" 추석 연휴를 보내고 난 후, 처음맞는 주말이다.

 

   입추도 지나고 이제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 제법 선선한 기운이 감도는 휴일 아침이다.

 

   하늘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지만 비가 올 것 같지는 않다.

 

 

   오늘은 매요리 마을에서 출발하여 복성이재까지 도상거리로는 8.9km, 실측거리로는 11km의 거리다.

 

   마을 뒷산처럼 나즈막한 산에 변변한 이름조차 없는 산봉우리를 가야하는 구간이다.

 

   그런 영향을 받은 걸까?  참여 인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오늘 백두대간 8차와 10차 종주팀을 합쳐 45인승 버스와 25인승 버스 두 대로 나누어 출발한다.

 

 

 

 

 

▲ 10시 10분/ 매요리 마을을 출발.

 

 

10시 10분, 마을회관을 배경으로 오늘 참석자 전원이 기념사진을 찍고, 백두대간 세 번째 구간 길을 떠난다.

 

대간의 원마루금이야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동네 가운데를 지나 뒷산 언덕으로 이어지겠지만

 

자연스레 동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유치재에서 원마루금으로 진입하게 된다.

 

  

 

 

▲ 선답자들의 흔적.

 

 

 

 

 

   매요리 마을회관에서 10분정도 걸어 왔을까.  제재소로 보이는 폐건물 앞에서 산으로 향하는 들머리가 보인다.  

 

 

 

 

 ▲ 유치삼거리.

 

 

 

유치(柳峙)삼거리라고 씌인 이정표를 따라 야즈막한 야산으로 진입을 하게 되는데,

 

이산이 해발 618m의 가산(佳山)이고 , 가산에서 앞으로 바라보이는 마을의 이름이 "가산리"라 한다.

 

 

그리고 가산에서 도로를 건너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야즈막한 야산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는 황산대첩의 전설이 전해오는 황산(荒山)이다.

 

 

가산의 높이가 618m에 이른다지만 동네 마을 뒷동산보다 작아보이는 언덕이다.

 

그 이유는 출발지점인 유치삼거리의 고도가 470m로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치삼거리에서 가산을 지나 88고속도로가 지나는 사치재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40분정도되는 거리이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백두대간 마루금인  가산(佳山)으로 오르면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누런 황금들판 가운데로 조그만 마을이 보이는데

 

이곳이 우리나라 판소리 "동편제"의 창시자 "송홍록" 선생이 태어난 생가가 있는 곳이다(아래 사진).

 

  

 

 

가산과 황산 (매요리 주변)

 

 

송홍록 선생은 우리나라 판소리를 꽃피워, 이조시대 철종 임금으로부터

 

가왕(佳王)의 칭호를 받고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의 벼슬까지 하사 받았던 인물이다. 

 

동편제의 창시자 송홍록선생의 뒤를 이어 "송만갑"이 동편제를 완성시켰다고 하고,

 

우리의 귀에 익숙한 국창"박초월"선생은 송만갑의 제자다.

 

 

 

우리나라의 판소리는 섬진강을 기준으로 하여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뉘는데,

 

"동편제"는 섬진강의 동쪽, 즉 운봉을 모태로 하여 남원, 구례, 순창등지에서 성행했던 판소리의 형태이고,

 

"동편제"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서편제"가 있는데

 

"서편제"는 섬진강의 서쪽인 광주, 나주, 해남, 장흥등지에서 성행하여 "서편제"라 구분된다고 한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차이점을 보면,

 

동편제의 가락은 음절을 딱 딱 끊으며 육자배기로 내지르는 소리 위주로 "흥보가" 적벽가"등이 이에 속하고,

 

서편제는, 동편제와 달리 애절하고 소리 끝이 길게 늘어지고 특성이라고 한다.

 

춘향가, 심청가등이 이의 장르에 속한다고 한다.

  

 

 

 

 

 

 ▲ 사치재./88고속도로.

 

 

 

 

 

 

 

 

 

▲ 산불지역.

 

 

   사치재를 지나면서 조그만 오름길에 갈대가 하늘거린다. 

   갈대사이로 죽은 나무는 고사목(枯死木)이 아니고 산불로 인하여 그을린 화사목(火死木)들이다.

   밑둥만 남은 채 제멋대로 널부러진 나무들이 애처롭다.  

 

 

 

 

▲ 헬기장에서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시원스럽다.

 

 

   그런대로 가파른 오름길이 나온다. 그래도 오늘 산행중에 제일 가파른 구역이다.

   사치재 고속도로 지하통로로를 지나온지 10여분만에 넓다란 헬기장이 있는 산정상에 이른다.

   사방으로 탁트인 조망이 시원 스럽다.

 

 

 

 

▲ 지나온 마루금.

 

 

   정상에서 뒤를 돌아보면 고남산과 수정봉등 고리봉에서부터 지나왔던 마루금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으로는 하늘거리는 억새꽃 너머로 올망졸망한 작은 봉우리인 백두대간 마루금이 펼쳐진다.

 

 

 

 

    동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가산과 지나온 마루금이, 그 뒤로 바래봉의 산마루금이다. 

    왼쪽으로는 지리산연릉과 천왕봉이 조망된다.  

 

 

 

 

   발아래로는 88고속도로변의 지리산휴게소와 인월면의 황금 들녘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으로 지리산 연릉과 최고봉인 천왕봉이 조망된다.

 

 

 

 

 

▲ 오늘 유일한 암릉이 보인다.

 

 

 

 

 

▲ 선답자들의 흔적.

 

 

 

 

 

▲  물매화.

 

 

  이름도 모르고 꽃이 예뻐서 담아 왔는데 "무광도사"님의 산행기를 보고 "물매화"라는 것을 알았다.

   

 

 

 

 ▲ 남근석이라 부르기는 어딘가 부족하지않을까?.

 

 

 

 

 

 ▲ 다음에 가야할 백두대간 마루금./봉화산과 백운산이 보이고...

 

 

 

 

 

 ▲ 흥부의 전설이 어린 아영면 들판과 백두대간 마루금.

 

 

 

 

 

아막성터.(전라북도 지방기념물 제38호지정)

 

 

  시리봉 남쪽 남원시 아영면 성리에 위치한 이성은

 

  백제에서는 아막산성으로 부르고, 신라에서는 모산성으로 불리던곳으로

 

  그당시에는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을 잡기위해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인곳이라고 한다.  

 

  표지판에 보면 성의 둘레는 633m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지금은 허물어진채 방치된 폐허의 성이다.

 

 

 

 

 

▲ 오늘의 유일한 증명사진 한장이다.

 

 

 

 

 

 

▲ 아막산성.

 

 

 

 

 

▲ 아막산성에 핀 구절초.

 

 

 

 

 

 

▲ 흥부의 마을 성리로 가는 고갯마루.

 

 

 아막성터를 지나 아래로 내려서면 오른쪽으로 성리 "흥부마을1.5km"라는 이정표가 있고 작은 소로길이 있다.

 작은 둔덕과 같은 산을 넘으면 금새 10분도 안되어 14시쯤 오늘의 날머리 복성이재(해발 550m)에 도착하게 되는데,

 

총산행거리 약 11km로 백두대간 산행의 거리로는 약간의 짧은 듯하지만

다음번 산행과의 연계를 고려하여 오늘 백두대간 세번째 구간 산행은 여기서 마무리 한다.

 

[복성이재와 복성마을의 유래/퍼온글]

400여년 전 임진왜란때의 일이다. 변도탄이라는 천문지리에 밝은 기인이 있었다.

일명 변도사로도 부르는데 이 분은 조정에서 군량미를 관리하는 관원으로 있으면서 어느날 우연히 천기를 보니

멀지 않아서 나라에 전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므로 국난에 대비할 것을 상소했으나

평화시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행위를 한다는 이류로 삭탈관직을 당했다.

변도사는 허탈한 심정으로 집에 와서 앞날을 염려 한탄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북두칠성의 왕별이라는 복성(福星)이 유난히도 남쪽으로 빛을 발하고 있어서

천문지리에 밝은 변도사는 평시에 비치했던 많은 양식을 달구지에 싣고

복성의 빛을 따라 여러날 걸려서 이 곳에 당도한 뒤에 움막을 지으면서 나무로 얼개를 짜고 벽과 천정을 쌀가루로 반죽해서 발랐다.

그렇게 되자 아무도 쌀가루로 집을 지은지를 몰랐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가서 왜구의 침입으로 국토는 유린당하고 이리저리 몰리는 피난민은 아비규환이였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적에게 살상 당하는 자, 피난길에 굶어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이 때에 변도탄의 움막은 이 지역에서 싸우던 의병과 관군과 난민의 양곡간이 돼서

천정과 벽을 떼어 죽을 쑤어 먹고 연명하면서 왜구를 무찌를 수가 있었다.

난이 끝난 뒤에 조정에서는 앞을 내다 본 변도탄의 충성심과 뛰어난 지혜에 감탄하고 큰상을 내렸다.

변도사의 선성이 주위에 알려지자 한 사람 한 사람씩 모여들어 복성(福星)마을이 됐다.

오늘날 남원군 송동면 일원에 살고 있는 변씨들이 변도탄의 후예들이라 전한다.

 

 

 

 

 

▲ 복성이재 풍광.

 

 

 

[아영면 성리에 전해오는 흥부의 전설/ 옮겨온 글]

 

 복성이재 남쪽으로 흥부전의 배경이 된 남원시 아영면 성리 마을이 있다.

아영면 성리 마을은 전해오는 설화와 지명을 근거로 ,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로 밝혀졌다.

이마을에는 오래전부터 복덕가, 춘보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흥부가와 춘보설화는 가난끝에 부자가 된 인생 역정,

선덕의 베품을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그 내용이 유사하다.

 

실제로 성리미을에는 박춘보의 묘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다.

매년 정월 보름에 망제단에서 흥부를 기리는 춘보망제를 지내오고 있다.

성리에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등의 지명은 고전에도 등장했던 지명이다.

지금은 길 양옆으로 감자농사가 한창인 허기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 사람들이 도운 고개라고 전해지고 있다.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으로, 흥부는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준 발복 집터이다.

실제 '고둔'이라는 지명은 곳집(창고)이 모이는 터, 즉 부자가 되는 터라는 것이다.

이곳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넘어가는 짓재 고개마루에 높다랗게 자리자고 있으며마을의 산자락과 이웃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사금모퉁이'는 사금꾼들이 금을 채취하던 곳으로, 흥부가 이곳에서 금을 주워 부자가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남원의 설화로는 이곳 흥부마을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인월면 성산마을에서도 계속된다.

인월면 성산마을은 박첨지 설화가 전해 오는 곳으로 흥부의 출생지로 밝혀졌다.

놀부의 모델로 알려진 박첨지 묘를 비롯해 타작마당, 박첨지네 텃밭, 서당터가 자리잡고 있다. 성산마을은 매년 삼월 삼짓날 박첨지의 제사를 지낸다.

 

 

 

 

▲ 복성이재 풍광.

 

 

 

 

▲ 복성이재/ 다음에 가야할 들머리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