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백두대간Ⅱ(終)

[9차] 중재->백운산->영취산->944봉 ->백운봉->깃대봉->육십령

雪松 2010. 12. 27. 09:15

  백두대간 왕복종주(北進) 9차/ 백운산 구간.

 

 

  제9차 : 중재->백운산->영취산->944봉 ->백운봉->깃대봉->육십령.

 

 

 

*일시 : 2010년 12월 26일 (일요일)   

 

 * 날씨 : 오전은 맑음./오후는 눈과 바람.

 

 * 누구와? : 대자연 산악회 10차(8차) 백두 대간 종주팀과 함께..

 

*코스 및 거리 : 총 산행거리 19.07km(접속거리 별도)  

 

     중재-(4.35㎞)->백운산 -(4.35㎞)->영취산-(4.6km)->977봉-(3.6km)->깃대봉-(3.07)->육십령.

    

 * 누적거리 : 총734.65km중/ 117.83km진행.

 

구간 진행시간(총 7시간 18분/ 접속거리 및 휴식시간 포함)

    ○ 09:47 - 지지리

    ○ 10:02 - 중재.

    ○ 10:33 - 중고개재.

    ○ 11:45 - 백운산(1,278.6m).

    ○ 13:20 - 영취산(1,0.75.6m).

    ○ 13:57 - 백운봉.

    ○ 15:13 - 북바위.

    ○ 15:36 - 민령.

    ○ 16:10 - 깃대봉.

    ○ 17:05 - 육십령.

 

 

 ▲ 오늘의 흔적.

 

30년만에 찾아왔다는 강추위에 전국이 꽁꽁 얼어 붙었다.

오늘 아침 대전의 기온이 영하 12.9도로 그나마 어제와 그제보다는 조금 풀린 날씨란다.

대전 IC를 거쳐 덕유산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장수 나들목을 거친 버스는 눈이 살포시 깔린 무령고개를 치고 오른다.

전에는 무령고개를 넘어 지지계곡으로 길은 비포장길이었는데 버스가 다니도록 도로가 뻥 뚫리었다고 한다.

 

좌측으로 보이는 창가너머로 장안산 자락에 새하얀 눈꽃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한번도 가지 않았던 눈길을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서 9시45분지지계곡 중재 들머리에 도착한다.

예전처럼 기념사진을 찍고 계곡을 건너 중재를 향해 오른다.

 

 

 

 ▲  9시 45분, 지지계곡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배   

 

 ▲ 10시03분,/ 중재.

 

 

 

▲ 10시 33분,/중고개재.

 

 

 

 ▲ 백운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장안산의 조망.

 

 

 

 ▲  남쪽으로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마루금./ 좌로(맨뒤) 지리산은 구름속에 가렸다.

 

 

 

▲  백운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지지계곡./ 백운산과 장안산을 가르는 계곡.

 

 

 

 ▲ 저곳이 백운산 정상.

 

 

 

 

 ▲  백운산 정상부근의 눈꽃'

 

 

 

 ▲  백운산 정상부근의 눈꽃'

 

 

 

 ▲  백운산 정상부근의 눈꽃'

 

 

 

 

▲ 백운산 중봉./ 뒤로 지리산 천왕봉 마루금이 희미하다.

 

 

 

 ▲ 백운산 정상(1,278.6m)의 풍광./11시 45분.

 

백운산(白雲山)!

흰백(白), 구름운(雲)을 써서 산이 높아 산봉우리에 흰구름을 감싸안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는 전남 광양의 백운산(1,218.0m)을 비롯, 경기도 포천의 백운산(904.0m)등 전국적으로 백운산이라 이름붙여진 산이 3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백운산이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이곳 전북 장수군 백두대간상에 솟구쳐 있는 백운산(1,278.6m)이다.

 

이름에 걸맞게 산정상에서의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조망 또한 으뜸이다.

남으로는 월경산 뒤로 천왕봉과 반야봉등 지리산능선이 길게 하늘금을 긋고 있고, 북으로는 백두대간 능선이 말잔등처럼 길게 잔등을 이루며 깃대봉을 넘어 남덕유산으로 달려가고 있다.

서쪽으로는 장안산이 자리하고 팔공산을거쳐 성수산등 금호남정맥의 산줄기가 이어지고 있다..

 

동으로는 갓걸이산으로 불리는 괘관산이 지척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고 옆으로 황석, 거망산 그리고 월봉산이 있다. 뒤로는 금원,기백산과 수도산, 가야산도 가물거린다.

 

백운산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이 경계를 이루고 이 백두대간능선을 따라 물줄기의 운명이 갈라지게 된다.

지금가는 방향에서 우측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낙동강으로, 좌측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섬진강으로 각각 다른 운명을 타고 다른방향으로 바다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 백운산 정상에서..../ 오늘의 소그룹과 함께.

 

 

 

▲ 과거의 정상석/ 백운산 정상(1,278.6m)

 

 

 

▲ 백운산 정상에서의 조망./ 영취산.

 

 

 

▲ 백운산 정상에서의 조망./ 눈꽃이 핀, 거망.황석산이 보이고 뒤로 금원산과 기백산도 보인다.

 

 

 

▲ 백운산 정상에서의 조망./동으로 괘관산이다.

 

 

 

▲ 백운산 정상에서의 조망./ 오늘 가야할 산줄기 뒤로 남덕유산 동봉,서봉이 보이고..

 

 

 

▲ 맑은하늘에 웬 날벼락???/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 몰아치는 눈보라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 하지만 다시 날은 개었다. / 선바위고개.

 

 

 

▲ 영취산 정상 (1,0.75.6m)./ 13시 20분.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의 경계의 백두 대간상에 위치한 영취산은 백두대간의 마루금에서 금호남정맥이 분기하는 지점이다.

백두대간과 정맥의 산줄기는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따라 10대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의 흐름을 구분짓는 경계임은 이미 다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백두대간상에 위치한 이곳 '영취산'에서 물줄기의 구분은 또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취산 정상석 뒷면에 표시된 것처럼 이곳 '영취산'은 "섬진강, 금강, 낙동강"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분수령이 되는 곳이다.

백두대간 상에서 3강의 물줄기를 가르는 경계점은, 이곳 말고도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금강"의 물줄기가 갈라지는 "속리산의 천왕봉"이 있다. 그래서 이 두 곳을 三派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하며 백두대간 물줄기 구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난번 백두대간 길에서 두번과 금호남정맥때와 그리고 오늘까지 정맥과 대간길에서만 모두 네 번을 찾아 온 곳이다.

'영취산'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은 이곳 말고도, 불교의 성지로 널리 알려진 "양산 통도사의 뒷산인 영취산"과 진달래군락지의 대명사로 알려진 "여수 영취산"이 있다.

하지만 이곳 '영취산'은 대간과 정맥종주자를 제외하면 사실은 일반인에게는 그리 널리 알려진 산이 아니다.

 

 

 

 

 

▲ 영취산 정상에서(1,0.75.6m).../사진 맑을숙.

 

 

 

백운산에서 영취산을 이어진 마루금을 돌아보니...

 

 

 

▲ 논개생가 갈림길

 

[논개에 대하여.../옮겨 적은 글입니다.] 

 

논개는 이름, 호는 의암, 성은 신안 주씨이며,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논개는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시-1574.9.3밤)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를 짚어보고 계집애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뻐하였다.

이름을 논개라고 지은 것은 딸을 술시에 낳았으니까 개를 놓은 것과 같고,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 즉 ‘논개’가 되므로 그렇게 이름 붙이면 역신도 시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다.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논개 나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지할 곳 없던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숙부는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고 이웃 마을에서 밥술깨나 먹고 사는 김풍헌에게 찾아가서 조카를 민며느리로 몰래 팔고 달아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논개 모녀는 부랴부랴 외가로 일시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 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재판관은 최경회 현감이었다. 최 현감이 자초지종을 캐보니 달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두 모녀를 최 현감은 내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도록 배려했다. 이런 운명적이 인연으로 최경회와 논개는 만나게 되고 최 현감집 식솔이 되었다. 논개는 잔심부름이 끝나는 대로 틈틈이 김씨 부인이 일러준 충효열의 뜻을 가슴 깊이 새겼다.


세월이 흘러서 논개 나이 17세가 되던 1590년 최경회가 담양부사로 재직할 때 두 사람은 부부의 예를 올렸다. 그 해에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를 고향 장수로 보냈다.


2년뒤 임진년(1592)에는 역사상 980여 회의 외침 중 가장 처참했다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상중인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옛날 현감을 지냈던 장수에 들러 의병을 모집하고 논개도 만났다. 실로 2년 만의 해후였다.

최 의병장이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킬 때 논개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최 의병장은 훈련된 500여 정예부대를 골자부대로 이름 짓고 무주 쪽으로 진격한 뒤 무주 우지치전투에서 첫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산음, 지례, 개령, 성주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면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 데에는 최경회가 이끄는 호남 출신 의병들의 성 외곽에서의 맹활약이 크게 주효했던 것이다.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그 소식이 장수에 머물고 있던 논개에게도 들려왔다. 논개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한시 바삐 진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남복으로 변장을 하고 진주로 가는 도중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오랜만에 논개를 본 최 병사는 한없이 반가웠지만, 회포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10만이 넘는 왜군이 진주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던 것이다.


6월 19일, 드디어 왜군은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해왔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성은 아수라장으로 초토화됐다.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 진주성 3장사는 성이 함락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해 하직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한편 전투가 한창일 때 논개는 성안에서 수발을 열심히 들었었지만, 성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 병사의 엄명에 성을 빠져나와 외진 곳에 은신하면서 전황을 살피게된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 병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개는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했다. 마침 칠월 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진주 관기들을 불러놓고 전승 축하연회를 갖는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논개는 이때를 놓칠세라 마음에 다지면서 관기들 틈에 끼여 연회장까지 들어갈 요량으로 관기들이 촉석루에 들어가는 시간과 길목 등을 정확히 알아두었다. 그러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로 여름옷 한 벌을 곱게 장만하고 가락지 등 필요한 물건도 구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논개는 관기처럼 곱게 단장하고 시간에 맞춰 길목에 서 있었다. 논개는 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해 들어갈 때 뒤에서 천천히 따라 가다가 발길을 돌려 촉석루 아래 강가의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가면 정체가 탄로날 위험성이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어 상대방을 유인해 보자는 계략이었다.


연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에 취한 왜장들이 문득 강가의 바위 쪽을 내려다보았다. 웬 선녀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강가의 바위 끝에 서서 자기들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것이었다.

왜장들은 한눈에 반하여 금시라도 여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정체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돌연 육척장신의 체격이 장대한 왜장 하나가 논개쪽으로 다가가면서 자기에게로 오라며 소리쳤다. 논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면서 왜장을 유인했다. 왜장은 논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자기도 모르게 논개 앞으로 다가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기쁘게 맞이하면서 왜장을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논개가 살해한 왜장은 힘세고 용맹스럽기로 유명한 맹장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논개가 순절한 바위를 후인들이 의암이라 이름 짓고 논개와 동일시하여 호가 되었다.
이상이 위에서 논의된 문헌, 설화 등을 집약해서 구성한 의암 주논개의 일대기이다.

 

 

 

▲ 덕운봉 정상./실제 정상은 조금 떨어져 있다.

 

 

 

▲ 지나온 백운산과 영취산의 마루금./ 백운산 정상으로부터 구름이 몰려온다.

 

 

 

▲ 깃대봉을 향하여 오늘 가야 할 백두대간 마루금./ 맨뒤가 깃대봉.

 

 

 

▲ 첫번째 전망바위.

 

 

 

▲ 산죽길.

오늘구간은 유난이 산죽이 많다.

사람의 키보다 더 큰 산죽이 길양옆으로 도열하듯 서 있다.

이산죽이 제멋대로 우거졌다면 이길을 가는 대간 종주자는 아마도 죽을 맛이었을게다.

이것은 우연히 이렇게 조성된것이 아니고, 아마도 이지역 지자체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가고 있는 대간 마루금 좌측은 "전북 장수군"이고 우측으로는 우측으로는 "경북 함양군"이다.

어느 지자체에서 산마루금 산죽길을 말끔히 정비해 놓았을까 궁금해진다.

 

 

 

▲ 북바위.

 

15시 13분, 좌측으로 조망바위가 나온다.

장수군 논개생가 마을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보라가 조망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가지에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매달아 놓은 표지판이 바람에 제멋대로 흔들린다.

"북바위산 977m" 이곳이 지도상에 977봉으로 표시된곳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경계짓는 마루금이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의 영토분쟁지역이 되어 승리하면 이곳에서 북을 쳤다고하여 '북바위'라부른다고 전해진다. /이상 표지판에 적힌 내용..

 

 

 

 

▲ 민령.

 

하늘에 있어야할 구름들이 세찬 바람을 몰고 땅으로 내려왔다.

좌측 볼때기가 점점 감각을 잃어가고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에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예상보다도 긴산행길이다.  길옆에 멈추어서 보온자켓을 더 입고 쵸코렛을 꺼내서 허기도 달래고...

 

억새군락지가 연속으로 이어지더니 사방으로 사람발길의 흔적이 있는 밋밋한 고갯마루에 이른다.

"민령"이다. 지형이 밋밋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일께다.

이고개 아래로는 대진고속도로의 "육십령터널"이 지나가는 곳이다.

 

 

 

▲ 한동안 억새밭이 이어진다.

 

사나운 눈보라는 점점 강도를 더해가고, 일행들과는 점점 거리가 생긴다.

점심이 부족했는지 배가 고파 도져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밭속에 혼자 주져 앉아서 쵸코렛을 꺼내 허기를 달래는 사이 소그릅 일행들은 저만큼 멀어져 가버리고 없다.

 

시간을 보니 13시 36분인데 개념도상의 거리로는 아직도 4KM정도가 남았다.

깃대봉으로의 오름길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두시간 정도는 더가야하지 않을까...

 

 

 

▲  깃대봉 정상.

 

16시 10분, 어렵사리 힘들게힘들게 깃대봉 정상에 이른다.

먼저 가던 일행이 아직도 정상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상엔 에전처럼 깃대가 세개 그대로 있고, 그옆에는 "구시봉"이라는 새로 설치한 정상석이 자리하고 있는데,

정상석 뒷면에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적혀 있다.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그아래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이 기를 꽂았다하여 깃대봉이라 불렸으나.

옛날 한풍수가 이산에 올라 산의 형태가 구시형이라하여 2006년 1월 6일 '구시봉'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산림청-

 

어떤 풍수가의 뜻에 따랐는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깃대봉'이란 이름은 버리고 '구시봉'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  깃대봉 정상에서.../ 홍수표님 찍음.

 

오후 4시 12분, 깃대봉정상에 몰아치는 눈보라가 매섭다.

깃대봉을 지나면서부터는 순탄한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10분도 채되지 않아 깃대봉 샘터가 나온다.

어둠이 내리려는지 주변이 어두워 지는 느낌이다. 산속에서는 밤이 일찍 찾아오기 마련이다.

 

 

 

▲  깃대봉 샘터.

 

16시 20분, 샘터에서 물한모금씩을 나누어 마시고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정상 마루금의 길은 생태복원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막아 놓고 북측사면으로 샛길을 만들어 놓았다.

정상을 피할수 있으니 오르내림이 덜하여 피로는 덜하나 북쪽에서 몰아치는 바람에 좌측볼이 얼어 붙은 듯 감각이 없어져간다.

이왕이면 남쪽 사면으로 길을 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육십령 광장이 내려다 보일즈음 삼거리 길이 나온다.

직진을하면 육십령 광장으로 직접 내려가고 우측 길로 접어들면 육십령 휴게소로 내려가는 길이다.

지난번부터 선두를 책임지기로한 선두대장이 마중나와서 바닥지를 우측으로 깔아놓고 내려오는 사람을 안내하고 있다.

 

17시 05분, 이제 막 어둠이 시작되려는 육십령 휴게소 광장으로 내려선다.

바람과 함께 눈보라의 강도는 점점 세기를 더하고 우리를 태우고 갈 뻐스는 하얀 눈을 가득 뒤집어 쓴채 광장 한구석에 서 있다.

 

심한 눈보라 속이지만 그속에서 버너 불을 피워 놓고 어묵과 라면을 끓이고 있는 버스기사님의 열정이 눈물겹도록 고맙다.

반쯤 끓다만 어묵을 안주삼아 추위도 달랠겸 소주한잔으로 대충 빈속을 채우고나서 눈을 피해 버스안으로 들어온다.

차창 밖으로 눈발이 더 거세진다. 속수무책으로 쏟아지는 눈을 그냥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머지 않아 후미도 하얀눈을 온몸에 뒤집어 쓴채 어둠이 내려진 육십령에 도착하고 주변 정리를 마친다. 

오후 6시 15분쯤, 무사히 눈길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44명의 염원을 아는지 우리를 실은 버스는 하얀 설원길을 기어가듯 육십령을 뒤로하고 고속도로 서상나들목을 향해 떠나간다.

 

 

▲  육십령 날머리(휴게소 쪽으로)/17시 5분, 하산.

 

 

 

[육십령(六十嶺)에 대하여 전해오는 예기들]

 

육십령(六十嶺)!!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전주와 대구를 잇는 26번 국도가 지나가는 고갯마루다.

지금이야 산아래로 터널이 뚫려 대부분의 차랑이 터널을 이용하므로 해발 734m의 육십령 고갯길은 오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한적한 고갯마루로 변해 버린지 오래다.

 

육십령의 또다른 이름은 육십현(六十峴), 또는 육복치 (六卜峙)라 하여 덕유산과 백운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신라때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알려져 왔다. 이곳 육십령에는 옛적부터 전해오는 얘기가 많다.

 

첫 번째는, 안의 감영에서 육십리가 되고 장수 감영에서도 육십리가 되어 '육십령'이라 했다는 얘기이고,

두 번째는, 이고개를 넘으려면 크고 작은 육십개의 고개를 넘어야만한다고해서 '육십령'이라 했다는 얘기며,

세 번째는, 옛날에 이곳에 산적들이 많아서 육십명이 모여서만이 갈수 있었다해서 '육십령'이라 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이고개를 넘기 위해서 양쪽 산아래마을에서 며칠씩 묵어가며 기다렸다고 하고, 지금도 마을밑에는 장정들이 모여있던 주막이라해서 장군동(將軍洞)이란 마을이 있고, 또 하나는 산적을 피해서 살다가이루어진 마을이라해서 피적래(避賊來)라는 마을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세 번째 얘기는 "신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